한줄 詩

버리고 갈 것만 남아 - 최정

마루안 2018. 2. 15. 09:48

 

 

버리고 갈 것만 남아 - 최정

 

 

냉장고는 고장난지 오래

세탁기는 덜컹덜컹 자주 멈추고

텔레비전 버튼은 잘 눌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언제고 떠나려 새것 사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사실은 다행이지 않다

쓸 일 없어진 침대도

들춰본 지 오래된 책들도

하다못해 서랍에 넣어둔 각종 고지서들도

일일이 확인해 버려야 하고

느려 터진 컴퓨터를 버릴까 말까

 

도시를 청산하는 일에 버릴 것만 남아

숨만 쉬고 사는 데도 돈을 청구하는 도시에게

조금은 시원섭섭하고

버릴 것들마저 돈으로 계산해 주는 도시에게

차라리 감사해 하며

무엇을 더 버릴까 궁리하는 하루

 

내 마음에서는 무엇을 버리고 갈 것인지는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날이 저문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야 하는 깊은 산골에서

늦깎이 농부로 살아남으려면

한 줌 흙 같은 시인이 되려면

어느 귀퉁이 마음 한 칸 버리고 갈 것인지

두 칸, 세 칸 아니 다 버릴 것인지

미처 물어보지 못하고

 

 

*시집, 산골 연가, 리토피아

 

 

 

 

 

 

막차 - 최정

 

 

막차,

이 말은 나를 설레게 한다

 

시외로 가는 차표를 끊곤 했다

여고 2학년 하숙생 시절

낯선 곳을 떠도는 방랑자처럼

나의 설렘은

차창에 부딪치는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의 미래가

엉킨 실타래처럼 창밖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막차를 타게 되리란 것을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늘 다행이었다

어둠의 입자처럼 착 달라붙어

캄캄한 차창 응시하며 돌아오는 길

다시 얌전한 아이가 되곤 했다

 

막차,

이 말은 아직 나를 설레게 한다

이 마지막 차를 탈까 말까 위태롭던

그 막막함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겨우 잡아 탄 막차처럼 또 내 인생은 흘러갈 것이다

 

 

 


# 최정 최정 시인은 1973년 충북 중원 출생으로 인하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시 창작 모임 <뻘>, 동인 <매립>에서 활동했다. 시집으로 <내 피는 불순하다>, <산골 연가>가 있다. 현재 경북 청송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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