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아에게 - 기혁

마루안 2018. 2. 13. 22:30



미아에게 - 기혁


여름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잠든 개에게서
독신(獨身)이라는 말을 배웠다

하나의 원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건 편파적인 생애

매일 밤 수직의 고단함을 은폐하던 양초와
떨어진 후에야 벚나무의 내력을 각주로 덧붙이던 벚꽃처럼

외로움이란 연필심 묻어나는 모양자를 가져갈 뿐
변명의 괘도를 그려 오지 않는다

눈감지 못한 혈육의 눈꺼풀을 쓸어내릴 때
동공의 연륜을 따라 반짝이던 별빛들이 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홀로 마신 저녁을 게워 낸 물새가
눈 속으로 들어온 별빛을 뒤적거리며 날아가는 곳,
지구라는 푸른 경이(驚異)를 한 장 엽서로 보내온 오빠에게

누이는 자신의 화법이 우주 비행사의 두 눈을 닮아 있음을 슬퍼한다

객사한 직계의 시신을 대문 앞에 두는 풍습을
원근(遠近)이 어긋난 삶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으나
서로를  침범하지 않을 만큼만 나이테를 늘려 가면
익숙한 곳에서부터 길을 잃곤 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한평생 대문을 열고 잔 노모(老母)가 사방을 걸어 잠근 채
동공 속에 떨어진 연필심을 털어 낸다고

되돌아온 손을 잡으면 중력이 없는 슬픔에도 눈물이 고였다

서로 다른 윤곽으로 맴도는 우주의 한 이름, 미아
일생에 두 번 타인의 원주를 지나야만 한다


*시집,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민음사








외곽 - 기혁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마중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내부에 우주가 있다는 말보다
무대가 있다는 말이 더 승산이 있다는 거.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엔 제명된 명왕성이 궤도를 돌고
수명을 다한 인공위성도 빛을 낸다
그런 하늘 밑으로 별똥이 떨어진다면
별똥을 보며 빌었던 소원은
입구와 출구가 동일하다는 거.


억지로 내뱉은 인사말이
실수로 내뱉은 대사보다 자연스러울 때
당신의 무대를 상상하면
나는 늘 분장실에 기거한다는 거.


그런 곳에 가면 별똥 대신
진짜 똥이 떨어지기도 한다는 거.


외부순환로를 타고
아버지의 문상을 다녀오는 시간,
모든 마중이 사선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오래전 당신처럼 울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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