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체념을 위하여 - 박소란

마루안 2018. 2. 12. 19:58



체념을 위하여 - 박소란



희망과 야합한 적 없었다 결단코
늘 한발 앞서 오던 체념만이 오랜 밥이고 약이었음을


고백한다 밤낮 부레끓는 숨과 다투던 폐암 말기의 어머니
악착같이 달아 펄떡이던 몸뚱이를
일찍이 반지하 시린 윗목에 안장한 일에 대하여
마지막 구원의 싸이렌마저 함부로 외면할 수 있었던 조숙한 나약함에 대하여
방 한 귀퉁이 중고 산소호흡기를 들여놓고
새벽마다 동네 장의사 명함만 만지작거렸다
그 어떤 신념보다 더욱 견고한 체념으로, 어김없이 날은 밝아
먼 산 기울어진 해도 저토록 가쁘게
가쁘게 도시의 관짝을 여밀 수 있음을 알았다 습관처럼
사랑을 구하던 애인이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뒷걸음질 쳐 갈 때도
시험에 낙방하고 아무 일자리나 찾아 낯선 가게들을 전전할 때도
오로지 체념, 체념만을 택하였다 체념은 나의 신앙
그 앞에 무릎 꿇고 자주 빌었으며 순실히 경배하였다
체념하며 산 것이 아니라 체념하기 위해 살았다 어쩌면
이제 와 더 깊이 체념한다 한들 제 발 살 려 다 오
끝까지 매달리던 어머니의 원망 같은 무덤이 핏빛 흉몽으로 솟아오르고
안부조차 알 길 없는 애인이 허랑한 시절이 막무가내로 뺨따귀를 갈긴다 한들
행여 우연히 한번쯤 더듬거리듯 옛날을 불러세운다 한들
절망은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절망할 것이고
나는 기어이 침묵으로 순교할 것이다 다시 체념을 위하여
도망치듯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굳센 체념을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망명 - 박소란



실패다


오늘 공항에 앉아 생각한다
저 삼만 피트 상공에 올라 객쩍은 머리통이 몸통이 깡그리 파괴될 수 있기를
자연사할 수 있기를


어떤 의문부호도 참견하지 않는 명백한 죽음만이
내 오랜 꿈


과연
조금 전 든 여행자보험의 법정상속인은 누가 될 것인가
애당초 보험이란 게 존재하기는 했나 그렇다 한들


실패다, 삶이여, 삶기지 못한 감자여
여기 강마른 밭뙈기에 잠자코 엎드린
나는 너를 비난하고 싶다 사정없이 상처 입히고 싶다


단 한번 흉내조차 내지 못한 추락, 그 식어버린 표정에 대하여


그리움을 이야기할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은 모국
내 것이 아닌 이름으로 자꾸만 머뭇대며 살아 있는 일에 대하여


실패다
이대로 끝이 아닌 모두가 실패,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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