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붉은 화병 - 박이화

마루안 2018. 2. 8. 20:12



붉은 화병 - 박이화



아무도 갈아 주지 않는 사이
꽃도 물도 마른 지 오래다

사랑이 떠나는 날부터
속절없이 말라가던 눈물처럼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이
내 몸도 그렇게 말라 갔다

이제 꽃도 사랑도 썩는 일은 없겠지만
썩지 않고도 과연 꽃일까? 사랑이기나 할까?

한때 내 안의 7할을 채웠던 물기
어쩌면 그 많은 물기 때문에
내게도 우물 같은 한 시절 있었던 거다
복사꽃 피는 돌우물처럼
온 생이 붉던 한철 있었던 거다

그 한철
그대가 내 몸을 열어
수련처럼 깊숙이 긴 대궁 적시던



*시집, 흐드러지다, 천년의시작








덫 - 박이화



자고 일어나니 마당 한구석에
새의 깃털이 비명처럼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아마도 살찐 비둘기 한 마리
도둑고양이의 기습을 받았을 터이다


밥이 덫이 되는 현장에서
날개는 도리어 적의 커다란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미루어 보아
새는 한 움큼의 깃털을 버리고서야 간신히 살아남았겠지만
상처 입은 날개로 더 이상 새가 아닌 채
살아갈지 모를 일이다


날아야 하는데 날아주지 못하는 날개는
내게도 있다
언제 어디서 찢긴지도 모른 채
허공을 향해 단 한번 퍼득여 보지도 못했던
검은 반쪽의 그림자


결국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밥이며 덫인 걸까?


그래서 내 손을 탄 나무들
자꾸 시들어 갔는지 모르겠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꽃들이 바르르 진저리쳤는지 모르겠다


내 안의 이 속일 수 없는 짐승의 냄새 때문에
때때로 마음이 그토록 버둥대며 안간힘 쓰며
나를 벗어나려 몸부림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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