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운 전당포 - 조재형

마루안 2018. 2. 7. 22:21



그리운 전당포 - 조재형



막 피어오른 순정을 전당포에 맡겼다
투박한 눈빛을 담보로 함박꽃을 대여해준 그녀
보통은 패물 시세의 절반이 관례였다
발랄한 그녀는 화주가 맡기려는 바람보다
훨씬 더 많은 설렘으로 환산해 주었다
월 오부에 해당하는 지연금에 대하여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상계해 주었다
나는 하루하루 불면의 밤을 만끽했다
가난하게 연명하던 청춘은 풍요로웠다
질풍노도의 샛길로 접어든 나는
오랜 시간 미로 속을 헤맸다
다시 추억이 도사리는 옛 골목을 찾았을 때
연체로 쌓여가는 변심에 상심한 그녀는
폐문을 하고 멀리 이거한 뒤였다
이제는 수소문해도 찾아볼 수 없다
아, 그리운 내 전당표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 지혜출판








폐선 - 조재형



쓰레기장에 입항한 어선 한 척
빗살 주름이 깊에 파였다


동네 목공소에서 치른 진수식
처녀항로로 출항한 가난한 주방
침몰하는 밥맛 구하랴 좌현 우현 기울고
식칼의 벼린 파도에 베인 상처들
녹슨 못이 돌출한 갑판 옆구리
퇴행성으로 투병한 지 오래인 듯
삐걱거리며 갈매기 울음 새 나온다


끼니마다 맨몸으로 낚아 올린 고기들
통째로 선주 식탁에 진상하고
치어 한 마리 남기지 않았나 보다
깡마른 선체 바닥
헤쳐온 항로를 기록해 둔 것일까
곰팡이 문자 촘촘히 새겨 있다


기대수명 바닥난 저 도마
남은 중량이라곤 빈 어망 가득 채운
월척 고요 한 두름
허기진 목탄 난로의 공양미로 투신하려
분리수거용 포구에 잠시 정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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