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원 포인트 릴리프 - 여태천

마루안 2018. 2. 8. 20:55

 

 

원 포인트 릴리프 - 여태천


투수는 조심스럽게 볼을 던졌다.
전대미문의 구질을 구사한다는
진지한 표정으로.

스트리이크를 던지지 못한 저 투수의 볼과
볼의 궤적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핀치히터의 풀스윙.

가운뎃손가락을 높이 들고
오늘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눈
당신과 나는 편향적인 사람.

비밀을 알아낸 자의 표정으로
왼손 투수는 다시 볼을 던지고
저 볼은 어디에 가닿을 것인가.

주심은 언제쯤 스트라이크존을 걸치고 지나가는
저 비실비실한 볼을 이해할 것인가.
가장 편향적인 방향으로 생각은 날아간다.


*시집, 스윙, 민음사

 

 

 



마이 볼 - 여태천


야구도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렌지색 점퍼를 입고
스탠드를 메우고 있었다.

처음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 바닥 사람들은 외다리인 줄 알았다.
짝다리를 짚고 선 폼과
웃을 때 찢어지는 왼쪽 눈.
완성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한 팀이었다.

헐렁한 유니폼과 파마머리
팀의 단 한 명의 투수.
아무도 그의 폼에 속지 않았다.

소금물을 아주 조금씩 마셔 가며
간절하게 그는 매 이닝을 던졌고
우리는 아주 빨리 공격을 마무리했다.
플라이 볼을 잡는 게 귀찮았지만
그의 폼은 우리를 9회까지 버티게 했다.

크나큰 슬픔이 1루 측 스탠드에서 번질 때까지
우리는 크게 마이 볼을 외쳤다.

 



# 여태천 시인은 1971년 경남 하동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국외자들>, <스윙>,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가 있다. 2008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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