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작정 반하다 - 조항록

마루안 2018. 2. 5. 18:28

 


무작정 반하다 - 조항록

 


단지 몸짓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지
마음을 빼앗기면 몸도 쇠약해져
그렇게 병들기도 하지
마음에만 마음을 바치는 게 아니라
몸도 아닌 한낱 몸짓 때문에
종일 물구나무 서기도 함을
그깟 몸짓에 갈팡질팡하며
견디는 게
객혈이기도 함을


굳이 흔들지 않아도
바람의 몸짓에 돌연 고백하는 종처럼
고요한 심경에
불쑥 쏟아져내리는 종소리처럼

 

 

*시집, 지나가나 슬픔, 천년의시작

 

 

 

 

 


잠시 쉬어가는 평화 - 조항록

 


의리에 살고 죽는 비디오
한국판 대부가 끝나고
조용필이 막간 가수다
음악이란 무릇 은혜로운 것
부산항은 쓰러진 건달들에게 손짓하고
나 역시 돌아갈 집 있음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피곤함도 나름 짓누르지 못하는
신작로가 내다보이는 소읍의 다방
보리차가 끓고 있는 주전자에
설령 집어넣어도
흐들갑스럽지 않을 무중력의 마음
둥 둥 둥 염려 없이 떠다니는
마음이 놓아버린 지친 육체가 가깝다
여종업원에게 수작을 거는 건너편
남자들은 나이를 묻고 씨를 묻고
버려진 육체끼리 이 추운 날
서로에게 따뜻한 엽차나 되자구
나는 내심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세 시 삼십 분 발 시외버스가 지나가고
스웨터 같은 실내에 깊숙이 앉아
나는 남은 시간을 계산한다
떠나야 할 육체를 바라보는
마음이 한가하다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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