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픈 저녁 - 이용호

마루안 2018. 2. 6. 21:27



슬픈 저녁 - 이용호



무슨 유서를 뒤집어쓰고 있듯
등록금 고지서는 처연하게 내 손에서 종적을 감추고 있었는데
저녁 밥상을 다 비우신 아버지의 밥그릇으로
배고픔보다 더한 슬픔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찬 물에 말아 숭늉으로 드시며
허허허, 오늘은 배가 더 부른걸
막내의 밥술 위로 김치를 얹어 주시곤
오늘따라 사막을 거니는 낡은 젖소 같은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셨다, 그 캄캄한 밤에
어딜 돌아다니시는지
나의 밥그릇은 사막처럼 비어져
풀 한 포기 자랄 줄 모르는 폐허가 되어 있는데
한 술 두 술 쌓인 어머니의 한숨만
슬픈 고요처럼 밥상 위에 별빛으로 널브러져 있던,
내 오른손으로 책값 고지서마저 둘둘 접어
뒷주머니에 꽂은 채 잠이 든 그날 저녁
찬바람을 잠바 주머니에 넣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등 뒤로
아득히 떨어지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
아니 이 양반 또 애들 공책 사 오셨네
그 좋아하던 담배도 끊으시고, 쯧쯧
그러면 뭐해요, 핵교를 보낼 수 있어야지....,



*시집,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 현대시학








어머니의 밥상 - 이용호



학원에서 늦게 들어온 아이에게 늦은 저녁상을 차려준다 아이는 그릇을 댕댕댕 젓가락으로 부딪쳐가며 밥 한 공기를 후딱 해치운다 아이가 밥을 먹는 소리 사이로 저녁의 가슴이 밀려온다


그 옛날 마실 갔다 늦게 들어온 저녁, 소를 굶긴 내 어머니께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시면서 서둘러 소여물을 챙겨주셨었다 소가 여물을 되씹는 소리는 지상의 포유류가 낼 수 있는 가장 서러운 음악, 종일 굶은 개에게 밥을 챙겨 줘 보았는가 개가 밥그릇을 댕댕댕 핥는 소리는 이 세상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 소리


밥그릇을 다 비운 아이가 제 어머니의 젖은 눈을 바라본다 이슬 같은 빛으로 가난한 제 어미의 속을 울리는 저 눈망울은 이내 커다란 호숫가를 만든다 우리들 생애에 처음으로 건넜던 그 개울물을 만든다


이 세상 처음부터 다음 세상 끝까지라도 어머니가 차려놓으신 그 위대한 감격들이 밥상에 올려져 있다 수저를 들어 밥 한 숟갈을 입에 넣으면 하얗게 증발해버리는 세상의 상처들, 그 따스한 감격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밥상 위에 놓여있는 젓가락을 들다 그 옛날 어머니의 슬픈 계곡에서 울려 나오는 바람 든 무 소리를 듣는다 내가 세상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내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이다 덜그럭덜그럭 백기를 흔들며 어머니의 밥상이 울렁거린다


밥상에서 울려 나오는 우리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빛들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