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 능소화 마저 지기 전에 - 김일태

마루안 2018. 2. 5. 20:07

 

 

저 능소화 마저 지기 전에 - 김일태

-영월의 일기. 5

 

 

도계 너른 들판에

보리가 누렇게 파도치는 모양 보셨나요?

나도 한때 가슴에 삼복더위 일었던 적 있었지요.

내 육신 붉은 적을 버리고

나무그늘로도 식힐 수 없는

불덩이 같은 나를

팔뚝 굵은 사내에게 던지고 싶었던 적

주남의 너른 품 같은 사내 가슴에

오롯이 빠지고 싶었던 적 있었지요.

이 불같은 사랑의 가지 끝에

씨앗 하나 맺고 싶었던 적 있었지요.

 

열매를 기약할 수 없는 꽃이었지만요.

 

 

*시집, 오동나무에 열린 새벽달, 불휘미디어

 

 

 

 

 

 

외로움도 약 삼아 - 김일태

-영월의 일기. 18

 

 

환갑을 넘기고 기억이 희끄무레해지면서

머릿속에 찍듯이 생각해놓은 것도 그냥 잊고 지나게 되네요.

살아있다는 것을 이리 깜빡깜빡 하는 만큼

서럽던 시절 기억도 쉬이 잊혔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게 희한하지요?

 

어제가 형님 제삿날이었음을 오늘 새벽 큰아이가 이고 온 음식을 보고

아차, 했지요

비록 살아 마음 섞지는 못했지만 당신 정을 이어받았으니

자반이라도 한 손 보냈어야 하는데 생각했지요

나 그대 처음이자 마지막 지아비로 연을 맺은 이유가

재물 탐해서도 풍채를 사모해서도 아니었지요

기적에서 나를 빼내주셨지만 꼭 그것만도 이유가 아니었지요.

 

매번 바람처럼 왔다가 가는

이별가의 한 대목처럼

바윗돌로 가슴 치듯 정을 떼고

먼지처럼 사라져간 무심한 사내들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 강에 몸을 훌쩍 던지고 싶은 생각 수없이 했었지요.

다시는 정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내게 주어진 운명이었지요.

 

두 살 위지만 늘 어른 같았던 당신

나를 떠나지 않고

다들 물건 취급하던 나를 사람으로 대해준 그것이 인연이 되었지요.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거리에서 따뜻하게 바라봐 주던

당신의 눈빛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당신과 떨어져 칼바람 부는 세상에 나를 다시 몰아세우면서

나 그대에게 다시 돌아갈 거라고

지켜지지 않을 다짐을 하지만

당신이 내 갈 길 피할 것 같은 예감마저 들지요.

멀찍이라도 그대 보고 싶을 때 간혹 있지만

외로움도 약 삼아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의 뜻이겠거니 생각하지요.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키고 싶지 않은 生 - 원무현  (0) 2018.02.06
슬픈 저녁 - 이용호  (0) 2018.02.06
흔적에 대한 보고서 - 이철경  (0) 2018.02.05
대짜고무신 - 서상만  (0) 2018.02.05
무작정 반하다 - 조항록  (0) 2018.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