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대짜고무신 - 서상만

마루안 2018. 2. 5. 18:50



대짜고무신 - 서상만



"대짜고무신 한번 보입시더!"
내 나이보다 서너 살을 앞서 부르던 어머니
장날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면
내 발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발가락이 헛도는 대자고무신을 신고
터덜터덜 산길을 걸었다
고무줄로 발등을 칭칭 조여도
발보다 앞서가는 문수에
십리 길 오리밖에 걷지 못했다


어느 날
흐르는 강물에 신발 한 짝을 던져버리고 돌아온 날
회초리를 내려놓은 어머니는 돌아서서 우셨다


고무신처럼 질긴 가난과 억척스런 어머니
내 발보다 작아진 어머니를 만나고 올 때면
헐렁한 신발 하나가 헐떡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잃어버린 신발을 찾으려고 나는 평생을 헤맸다
발 치수 마음 치수 꼭 맞는 짝을 찾아
먼 길 함께 걷고 싶었다


주인 잃은 신발은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오늘도 나는
외짝 헌 신발을 끌고 무작정 걷는다



*시집, 적소謫所, 서정시학








빈 배 - 서상만



폐선 한 척
잔파도가 깨워도
뭍으로는 더 밀리지 않겠다고
늙은 노을을 붙잡고 주저앉았네


가끔 저녁바다가 적막해
물수제비를 날려보지만
조는 듯, 죽은 듯
저 배는 미동도 없네


조타실 난간 위에 사뿐 내려앉는
저 갈매기 한 마리
이 배의 주인인 듯, 배의 정수리에
비린 주둥이를 닦고 있네


폐선에겐
갯바람에 허리 굽은 적막이 제격
흘리고 간
물새 울음 쪼가리가 제격


갈매기 입술보다 더 붉은 노을이
날마다 찾아주지 않았다면


저 폐선,
오래전에 숨을 놓았을 것이네





# 내 어릴 적 경험과 너무 똑같은 고무신 이야기다. 고무신 뿐인가. 바지도 한 칫수 큰 걸 사니 늘 바짓단을 한두 겹 접어 입었다. "내년이면 꼭 맞을 거다." 쑥쑥 크는 덩치를 예상한 말이다. 그러나 접은 바짓단을 풀기 전에 무릎부터 해졌다. 고무신은 밑창이 닳기 전에 내 발에 맞았던 적이 있었나? 까마득하다. 서상만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다. 내가 다소 염세적인 사람이어선지 이런 시가 좋다. 예전에 친구와 변산으로 여행 갔을 때 그도 그랬다. "너는 너무 염세적이야." 음악도 빠르고 경쾌한 음악보다 느리고 조용한 음악을 좋아한다. 시 또한 아름답고 말랑말랑한 뜬구름 잡는 싯구보다 사람 냄새 가득한 이런 시가 좋다. 천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