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 손택수

마루안 2018. 2. 3. 18:27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 손택수

 

 

내게도 공연한 일들이 좀 있어야겠다
일정표에 정색을 하고 붉은색으로 표를 해놓은 일들 말고


가령,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모종대를 손보는 노파처럼
곧 헝클러지고 말 텃밭일말정
흙무더기를 뿌리 쪽으로 끌어다 다독거리는 일


장맛비 잠시 그친 뒤, 비가 오면 다시 어질러질 텐데
젖은 바닥에 붙어 잘 쓸리지도 않는 은행잎을 쓸어담느라 비질을 하는 일


치우고 나면 쌓이고, 치우고 나면 쌓이는 눈에 굽은 허리가 안쓰러워
어르신, 청소부에게 그냥 맡기세요 했더니
멀거니 쳐다보곤 하던 일을 마저 하던 그 고요한 눈빛처럼


별 뜻도 없이 고집스레, 내 눈엔 공연한 일들에 노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상하지 않는가, 나는 이 쓸모없는 일들 앞에서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값지고 훌륭한 일도 많다지만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창비
 

 

 

 

 

 

 

마지막 목욕 - 손택수
-죽음의 형식 1


외할머니 가시고 열흘 뒤에 아버지가 가셨다
상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일곱살 무렵 강에서 수영을 하다 죽을 뻔한
아들을 구해준 마을 삼촌들께도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는 걸 잊지 않으며
술잔을 들던 모습이 내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목욕이란다
눈앞에 닥친 죽음을 맞기 위해 아버지는
살아서의 버릇대로 혼자서 욕실에 들어가
구석구석 이승의 때를 밀었다
그리고 나서 달력 뒷장에 정갈한 필체로
'잘 다녀간다, 화장 뿌려, 안녕.'
한마디를 남겼다 아버지가 죽음을 기다리던 그 시간
술꾼의 아들답게 나는 만취해 있었는데
제일 먼저 당도한 막냇사위 말로는
아버지 등에 박혀 있던 못이 풀렸다고 한다
평생 빠질 것 같지 않았던 손바닥 못도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고 한다
못도 산 자에게 박히는 것, 허리가 굽었던 사람도
죽으면 몸이 곧게 펴진다고 하더니
한평생 지게꾼으로 산 양반
아들도 해드리지 못한 안마를 죽음이 해드린 것인가
장례를 마치고 후줄근하게 땀에 전 몸을 씻다가,
멀어져가는 호흡을 놓치지 않고, 귀성길 준비라도 하듯
혼자서 마지막 의식을 치르시던 아버지의 고독한 밤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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