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쓸쓸한 연애 - 윤성택

마루안 2018. 2. 1. 19:41



쓸쓸한 연애 - 윤성택



백사장 입구 철 지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얽매여 군데군데 찢겨진 채였다
기어이 그녀는 바다에 와서 울었다
버려진 슬리퍼 한 짝과 라면봉지,
둥근 병 조각조차 추억의 이정표였다
해질녘 바위에 앉아 캔맥주 마개를 뜯을 때
들리는 파도 소리, 벌겋게 취한 것은
서쪽의 창에서 포말이 일었다
유효기간 지난 플래카드처럼
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치욕이냐고
상처의 끈을 풀어준다면 금방이라도
막다른 곳으로 사라질 것 같은 그녀,
한 줌 알약 같은 조가비가 놓인
밀물 드는 방에서 우리는 알몸을 기댔다
낡은 홑이불의 꽃들이 저녁내
파도 위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그녀가 잠든 사이 밖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바람이 불었다
나는, 꺼질 듯한 모닥불에
찢겨진 플래카드를 던져넣었다



*시집, 리트머스, 문학동네








주유소 -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