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말한다, 나의 아름다운 우주목 - 황학주

마루안 2018. 1. 31. 23:18



말한다, 나의 아름다운 우주목 - 황학주



귀담아들으라는 말을 들었다 오래전에


밥 차릴 수 없고
빨래할 수 없는 말이지만
혼자 사는 누군가의 고봉밥이 되던
한 바가지의 말, 닿지 않는 잔등을 시리게 씻어주고
그만 자거라, 불을 끄기도 하는


한밤 찬장에 엎어둔 사기그릇이나
뚜껑을 열어둔 쌀독 같은 데서
들려오는 소리 같다
귀 담 아 들 으 라
문지방을 넘다가 걸리는 아주 낮고 여린 목소리


가지를 잘라주려던 늙은 동백나무 뒤편은
햇빛 잘 드는 앞쪽과는 사뭇 다른 언어권이다
거기서 가지들은 종일 고쟁이 그늘을 입은
헐렁한 수준으로 말한다


그리고 몇해 동안
이 집 중앙의 아름다운 고목은
열여섯 꽃띠 시절을 내 앞에 데려다놓곤 운다
거울 앞에 자주 멈춰 선 느린 기억 뒤에
갈래머리로 앉아 있는 또다른 언어권


있잖니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 얼굴은 떠오르지만 그 얼굴은 들리지 않는다
한 얼굴은 들리지만 그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귀담아들었냐는 표정으로
당신은 떨어져 쌓인다
자신의 말을 자신의 귀에 모두 주워담아 떠날 날을 기다리듯이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창비








목포 - 황학주



양철지붕 위로 덜거덕대는 별밤을 노래하며 살았지
신발을 벗어들고 별과 별 사이로 공을 몰아오는 비명,
살 스치는 소리가 문신(文身에 닿는 동안
우리는 비가 와도 불을 끄지 않는 목포
항구까지 가고 싶었다


수난곡을 듣는 푸르스름한 별과 별 사이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보려는 듯 바닥이 없는 뜀을 뛰기나 하며
먼 곳만 겹쳐져 있는 먼 곳
종점을 옮겨다니다 벽 앞에 내리는 우리를 안고
양철지붕은 섬처럼 어두워지곤 했지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화를 낼 땐 아버지도 가끔 혼동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신기루처럼 언뜻 보일 사람인지 몰랐지만
왜 우리였는지 몰라 밤에도 대낮처럼 환한 목포
항구까지 가보았다


올려다볼 게 없어서 훌륭했던 곳
눈앞이 눈물일 때까지 간 곳에서 귀를 대자
적십자병원 뒤쪽이 하얗게 출렁였다
처음으로 푸른 바다가 몸에 들어 있는 놀라움을 고동 소리처럼 들었나보다


걷고 싶은 높이까지 띄워진
고하도(高下島) 모서리에
차갑게 걸린 샤위기 같은 눈 붉은 달이 보았을 텐데
배가 지나듯 벽이 지나는 순서는 되삼키는 시간과 연하여 있었다
울고 웃고, 희고 검게 재미없는 벽들이 다 나와 지나가주던 날
목포는 물의 잔뿌리들이 엉켜 이루어진 섬들의 천체
잘하면 발부리로 굴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오늘도 우리를 밀어주던 별들과 벽들의 명운은 교차하고
지금은 남은 벽도 몸 안으로 들어온 날
그다음 날





*시인의 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몹시 쓰고 싶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다. 얼마나 왔으며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아무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데, 눈밭을 걷는 당신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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