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복기(復碁) - 김광수

마루안 2018. 1. 30. 20:20

 

 

복기(復碁) - 김광수

 

 

혹여,
도리천 어디에라도 잠시 화생하여
이쪽 생애를 복기할 수 있다면
수미산 제석천 그물을 찢어내
증오와 자학, 비애 , 남루의 검은 돌 그림자는 버리고
취모검, 소요자재 유유자적의 정적으로
때론 딴전을 피우며
달빛 젖은 바둑돌을 함박눈처럼 뿌릴 것이다
비록 너의 돌이 내 숨통을 짓누르며 뒤통수를 찍더라도
둥근 돌의 무늬와 환한 달빛을 볼 것이며
나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비참하게 경멸하더라도
삼계육도 삼천대천세계가
노을 무렵 홀연 무너지는
아이들의 모래성 같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바둑판에 들어와 있는 바둑돌만큼의 우주와
바둑판 바깥 무량광대 경계를 오가며
한바탕 비천(飛天)의 춤을 꿈꾸었음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다 견딜 수 없이 허리가 아프면
마지막 돌을 던지고
깃털처럼 사뿐,
돌아앉을 것이다

 

*시집,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문학과경계사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 김광수

 

 

졸다말다 한동네 사는 시인의 옆동네 사는 시인의 시와 비슷비슷한 시를 읽다말다 버스 승강장을 지나쳐 날마다 비슷비슷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다 비슷비슷한 아파트 사이사이 보도블록, 비슷비슷한 와그너 치킨 닭다리 . 단란주점 . 지상의 네온관등처럼 빈 하늘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소망교회 십자가, 비슷비슷한 꿈을 가진 아이들은 비슷비슷하게 가르치는 몬테소리 유치원, 칸칸이 비슷비슷한 아파트의 욕망, 비슷비슷한 절망, 비슷비슷한 고통과 희망의 라인동산 아파트 공제선에 걸린 달도 어제와 그제와 비슷비슷, 비슷비슷한 슬픔에 취한 아지랑이 취객들, 길을 잃은 내 모습도 언젠가처럼 비슷비슷한데 아파트 울타리 찔레꽃 향기만 어둠 속에서 하얗게 하얗게 춤을 춘다

 

 

 

 

 

*시인의 말

 

완전히 옳은 것도

완전히 틀린 것도,

 

완전히 확정적인 것도 없다.

 

거지처럼 살면 거지이고,

꽃처럼 살면

꽃이다.

 

-어느 수행자의 비망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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