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둠의 경계 - 강영환

마루안 2018. 1. 29. 22:15



어둠의 경계 - 강영환



문을 밀치고 나서니 다시 어둠이다

앞쪽 어둠과 뒤쪽 어둠 사이에

누구나 다 아는 경계가 남아있다

투명한 어둠이라도 같은 것이 아니다

더 진하거나 더 악랄하거나 아니면

조금 더 불투명하거나 계단은 가파르고

끝에 선 벼랑은 절로 너무 깊다

밖에 나선 내게 길은 안보이고

길 가 늘어선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납작하게 엎드린 질경이풀이야

풀들이 내 지르는 비명쯤이야

뒤쪽 어둠이 감춘 핏빛 노을만 하랴

갈라진 상처에서 솟는 검은 고름만 하랴

문 밖에 늘어선 어둠들이 아프다

앞쪽 아픔보다 더한 아픔을 가졌나보다

눈을 가로막는 어둠이 더 진하다

발자국 아래 비명들이 납작 엎드려

다시 문을 열고 들어서도 더한 어둠이다



*시집, 공중의 꽃, 책펴냄열린시








해후 - 강영환



불이 나갔을 때 양초에 불을 붙였다

빛이 가슴에 와서 켜졌다 환하다

익숙한 길에 잊고 살았던 불씨였을까

따뜻한 손이 와서 내 안에도 불을 켰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투명한 얼굴이다

그를 잊고 살았던 것은 어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밝은 눈부심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나를 무겁게 갈아 앉히던 태고의 정적 속에서

허공에 걸린 외줄을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웅크린 나날 그는 날아가는 새의 날개였다

촛불을 간직하고 살면서 불을 붙이지 못한 나날들이

어둠에 나를 숨겨 놓았다 어둠 속에서

불을 붙였을 때 이윽고 만나는 환한 얼굴

대낮인데도 그 얼굴은 투명하게 비쳐보였다

그때서야 나는 촛불을 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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