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경우 - 이문재

마루안 2018. 1. 26. 21:35



어떤 경우 -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초기에 너무 좋은 시를 쏟아낸 이문재 시인의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다. 시력 30년이 넘은 세월에 다섯 번째 시집이니 과작이라 할 만하다. 초반에 너무 진을 뺐는지 초기시에 비하면 감동이 조금 덜하다. 내 맘대로 해석이다. 아마도 이문재 초기시가 내게 너무 활홀했던 탓일 것이다. 그래서 시도 사람도 처음에 너무 좋아하면 뒷감당이 난감하다. 인상적인 시인의 말 일부를 옮긴다.


시인의 말

10년 만에 묶는다. 네번째 시집 이후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왔다.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시를 나 혹은 너라고 바꿔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그러다보니 지금 여기 내가 맨 앞이었다. <이후 문장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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