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흰 모자 속의 마르크스 - 주창윤

마루안 2018. 1. 25. 19:38

 

 

흰 모자 속의 마르크스 - 주창윤

 

 

내 설운 잠이 가끔씩 이유 없이 들러서 잠드는 마르크스 묘지원으로 귀 닳고 눈 다친 안개만이 자욱하다 그대 또한 엷은 잠에서 자주 깨어나 역사의 진흙 구덩이 속을 헤매기도 하겠지.

 

아침 호텔 종업원에게 하이게이트 묘지원 가는 길을 물었을 때 "거기 가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저도 못 가보았는데 찾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요." 종업원의 말처럼, 몇 번이고 길을 물을 때마다 사람들은 각각 다른 방향을 알려줘서 나 역시 이 언덕 저 언덕을 헤매기도 했지.

 

돌이켜보면 역사는 우리가 세들어 사는 것. 역사가 그대의 평가처럼 이성의 몫이라면 그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나 역사는 그대의 묘지원 가는 길처럼 사잇길로만 비껴간다 그러나 우리는 세들어 살면서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두상 밑으로 방문객들이 적어놓은 메모들이 날아가지 않게 돌멩이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옆 다 시들어버린 프리지아 꽃의 향기가 말라 있고. 묘비문과 달리 나는 세상의 일부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늘 조급해하는 사람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모자를 잃어버렸다 순환선 전철 의자 위에서 주인도 없이 하루를 빙빙 돌고 있을 아내가 가장 아끼는 흰 모자.

 

 

*시집. 옷걸이에 걸린 羊, 문학과지성

 

 

 

 

 

 

마르크스와의 문답 - 주창윤

 

 

단단한 모든 것은 녹아 날아가서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듯했다.

 

공룡의 굵은 뼈도

이념의 성곽도 말없이 녹아버렸으므로.

 

정말, 그런 듯했으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에는

 

녹아 날아간 것들은

보다 더 단단한 세계의 일부가 되어 깨어지지 않았다.

 

 

 

 

# 주창윤 시인은 1963년 대전 출생으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영국 글래스고대 영화와 텔레비전 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 위를 걷는 자 물 밑을 걷는 자>, <옷걸이에 걸린 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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