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내와 비둘기와 참새 - 김장호

마루안 2018. 1. 26. 21:55



사내와 비둘기와 참새 - 김장호



그곳에 가면,
속도와 경쟁을 벌이는
시간의 울타리가 있다


그곳에 가면,
울 밖으로 밀려나
시간을 탁발하는 사내가 있다


어찌 익은 것만 떨어지랴
졸지에 세상 밖으로 추락한 사내
광장 바닥에 주저앉아 강소주 마시며
망연히 바라보는 길 건너 세상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나도 한때는 바닥에 추락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간 적 있다
바닥을 치면 겁나는 게 없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이는 바닥친 사람
아예 온전히 바닥을 쳐라 그래야
담양 왕대처럼 우뚝 일어선다


사내가 탁발해온 찬밥 한 그릇
아비가 어린 것들에게 밥을 덜어 주듯이
한 숟갈 던져주면
와락 달려드는 비둘기
쪼르르 따라붙는 참새


사내가 바닥을 다지고 있는
그곳게 가면,
빈 소주병으로 드러누운 권태를 떼어놓고
눈물겹게 탁발하고 보시하고 공양하는
사내와 비둘기와 참새가 있다



*시집, 나는 을이다, 한국문연








사랑니 - 김장호



뽑지 않았던 사랑니
환갑 나이에 다시 솟는다
볼이 퉁퉁 부은 참을 수 없는 통증
어른스럽게 어루만지고


세상에, 환갑에 사랑니라니
나이가 무색해지고
홀로 잠 못 드는 고즈넉한 밤
너에게 사랑을 배운다


분리수거한 사랑은 무효
분식회계한 사랑은 가짜
사랑하라, 다시 사랑하라
겨울 빈가지에 피어나는 눈꽃처럼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다
이 밤 가고 아침이 오면
가슴 한 켠에 묻어둔 목화꽃
그대 까칠한 손잡고 솜털구름이 된다





# 김장호 시인은 경북 달성 현풍에서 태어나 고교 때부터 고학으로 학업을 마쳤다. 대학에서 화공학, 대학원에서 홍보광고학을 공부했다. 체신공무원, 출판사 영업사원, 광고대행사 등에서 일했고 인쇄매체 광고대행사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2005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해서 <나는 을이다, <전봇대> 두 권의 시집을 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연 - 유영금  (0) 2018.01.27
자화상 - 김추인  (0) 2018.01.27
어떤 경우 - 이문재  (0) 2018.01.26
거룩한 환생 - 나호열  (0) 2018.01.26
흰 모자 속의 마르크스 - 주창윤  (0) 2018.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