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룩한 환생 - 나호열

마루안 2018. 1. 26. 19:31



거룩한 환생 - 나호열



오래되었다
사랑도 없이 먹먹한 세월이
설렘을 곰삭혔을까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역겨울 때
액자 안에서 멋쩍게 웃고 있는 시선이
허공을 떠도는 먼지 같을 때
슬며시 다가오는 기억 같은 것
훔치고 닦아 내면서 진저리치는 까닭에
언제나 마지막 뒷처리는
깨끗이
깨끗이 손을 닦는 일


한때는 황홀한 알몸을 애무하고
자물쇠도 없는 그곳을
장미로 피어나게 하던 그가
오래전 걸레가 되었다


걸레가 없다면
지난 밤의 얼룩과 더러운 눈물을
누가 지울까
그리하여 이 말은 욕이 아니다


걸레 같은 놈!



*시집, 눈물이 시킨 일, 시학사








참, 멀다 - 나호열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벌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