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간의 그늘 - 이용헌

마루안 2018. 1. 25. 18:48

 

 

시간의 그늘 - 이용헌

초사흘 달빛과 초나흘 달빛의 차이

열여드레 별빛과 열아흐레 별빛의 차이

달 내돋은 자리와 별 비낀 자리,

그 하루만큼의 변이

혹은 달빛과 별빛, 빛깔과 색깔,

그 한 낱내만큼의 간극

그 간극에 담겨 있는 티끌만큼의 순간

순간은 시간이 되고 시간은 빛이 되고

빛은 또 색이라는 무량수불 같은 묘법

하여 색은 공이요 공은 다시 한 줌의 빈 그늘

끝내는 비울 것도 없고 지울 것도 없는

저 시공의 눈자위는 얼마나 깊은 것이냐

누천 밤의 달빛으로 허공을 이고 서 있는

청평사(淸平寺) 앞마당 잣나무 일주문 아래

시간은 잎바늘 사이만큼 촘촘하게

슬픔의 그늘을 늘려가고 있다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천년의시작

 

 

 

 

 

 

오수(午睡) - 이용헌

진눈깨비 날리는 중부시장, 명란젓을 팔던 노파가 졸고 있다

갯지렁이처럼 불거진 손등을 무릎에 포갠 채

꼬무락꼬무락 바다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물너울 넘실대던 흥남 앞바다로 가는 것일까

스무 살 저편 그녀는 바다를 건너는 게 꿈이었다

한 뙈기 밭두렁에 눌러 붙은 열두 식구의 목구멍은

아버지의 그물질에 달려 있었다

망망창창 아침 바다는 매양 날것으로 반짝였으나

배가 고파요 어머니,

어느 해 겨울부터 어머닌 아버지를 깨우지 않았다

개마고원을 넘어온 높바람이 밤배를 밀던 밤

물살을 가르는 그녀의 등줄기에는 지느러미가 돋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물 속에서 팔딱이던 눈 퀭한 생선처럼

그녀의 눈동자엔 물거품이 일었다 지고

꿈을 짚던 관자놀이엔 아가미가 벌쭉거리고 있었다

낯선 포구의 밤이 흐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탱탱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뭇 사내의 알을 배는 일뿐이었다

밤마다 등지느러미를 흔들며 젖은 옷고름을 풀어헤치면

그리움의 자손들이 치어 떼처럼 몰려왔다

자줏빛 젖꼭지가 퉁퉁 불어 있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녀는 밤새 낳았던 알을 노을에 절이며 울었다

명란젓이요 명란,

길모퉁이를 도는 바람이 비닐천막의 치마폭을 걷어 올리자

한 무리의 명태 떼가 흥남 앞바다를 가르며 달아난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고쟁이 속에서 후욱, 갯내음이 쏟아진다

 

# 이용헌 시인은 광주(光州) 출생으로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공학과 법학을 공부하였고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