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북역에서 - 박승민

마루안 2018. 1. 25. 18:20

 

 

사북역에서 - 박승민


광산도 문을 닫고
사북에 내리는
손님은 없었다

일시 아동 보호소에
아이 맡기고 나온 미혼모처럼
철지난 코스모스들 나란히 서서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다

한때 네 마음의 징검다리를 밟고
건넜던 짧은 강이 있었다
그 강의 가는 지류가
파란 실 하늘처럼
가끔 내 가슴으로 흘러갔다

그런 날은 독한 술 한 잔 간절했지만
참기로 했다
세들어 사는 납빛 하늘 위로
막 눈 오려 하고
나는 또 다른 간이역으로 떠나려 한다

기차는 지나간 바퀴의 기억으로만 움직인다


*시집, 지붕의 등뼈, 푸른사상사, 2011


 

 



붉은 육손이 - 박승민
-도계에서


강바닥의 돌들이 무연탄을 닮아 하루도 맑은 날이 없었다.

그 강물 위로 생활을 너무 일찍 배운 붉은 손바닥들이 덤덤하게 떨어지고 있다.

 

찬 계곡물을 건너느라 더 벌게진 열목어의 눈자위를 닮은 어린 것이 조모의 손을 잡고 철길 위에서 강냉이를 뜯고 있다.

이 도시는 늦여름마저도 막장처럼 서늘해서 사람들의 눈도 일찍 단풍이 든다.

새벽이면 중지가 나간 까만 손들이 빨랫줄에 널려서 고무장갑처럼 발갛게 마르고 있다.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2016

 

 

 

 

# 박승민 시인의 시집 두 권을 나란히 놓고 읽는다. 오래 전에 나온 첫 시집과 작년에 읽게 된 두 번째 시집이다. 눈발 날리는 강원도 탄광촌을 여행한 후 쓸쓸함을 배낭에 가득 담고 돌아오던 추억이 떠오른다. 첫 시집을 읽다가 덮고 두 번째 시집을 다시 들추고, 번갈아 가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슬픈 시가 마음에 착 감겨온다. 나는 왜 슬픈 시를 읽을 때 재미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슬픔이 뚝뚝 떨어지는 시를 쓴 이 시인에게 빚이 있다. 열심히 읽는 것으로 그 빚을 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