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새들은 무조건 고향을 떠야, 고향이다 - 서규정

마루안 2018. 1. 25. 18:20

 


새들은 무조건 고향을 떠야, 고향이다 - 서규정


햇볕이 아무리 길어도 사각에까진 못 쳐들어온다
밀린 월세를 봉투에 넣어놓고 세 모녀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엊그젠 또 기업인이 억울하다며 북한산에서 목을 매달았다
자살이 그렇게 쉬우면 어떻게 어렵게 사나
시골에서 오래 살다 보면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농약을 먹고 멀리 떠난
장정들 더러 있었다, 대책이 없어야 혼자만의 사랑이겠거니
죽는다는 걸 군대 가는 것쯤으로 알았나 보다
지평선 위에 수평선을 포갠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간간이 휴가도 나올 줄 알았었나 보다, 더 더러워지기 전에
깨끗이 떠난 청춘들의 사례는 그럭저럭 인정할 수가 있었다
한번 가면 그뿐인 그곳을
조류학자들은 새들의 고장이라고 학술지에 발표도 하지만
새들은 고향이 너무 많다
앉았다 뜨면 무조건 고향일 수밖에 없는 그거

새똥 하나가 뿌연 농약 색 소금으로 남는다


*시집, 다다, 산지니

 

 

 

 

 

 

하루 - 서규정


냉정과 열정
왜 사니,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
예정도 없이 빡빡한 날들이 지루하기만 해
해롱해롱 술 먹고 죽어
캭 목매달고 죽어
벼락 맞아 죽어
연꽃연못에 빠져나 죽어
반역을 도모하다 총 맞아 죽어
춘투, 그 광장에서 노동자 대신 분신을 해
그보다 곱게 미쳐서 가
여러 가지로 죽어야 할 이유 중에
딱 하나 사는 방법은

살아가는 버릇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는 것이지

아침 태양은 스스로를 치우기 위해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듯이
하루는, 이렇게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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