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인과 바다 - 박후기

마루안 2018. 1. 25. 18:20



노인과 바다 - 박후기



늙은 처사의 새벽 비질에

요사채 마당의 허물이 한 꺼풀 벗겨진다

개미가 지나간 실낱같은 상처도, 지난 여름

지렁이 온몸으로 밀고 지나간 흔적도

댓바람에 먼지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오그라들며 어둠의 살갗을 잡아당기는

피딱지 같은 참나무 잎사귀들

멀어져 가는 九族의 안부를 물으며

한 세상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부서져 내리는 별들의 전생을

이마로 전송 받으며,

둥글넓적 지붕에 매달린 위성 안테나

이생의 주파수를 찾지 못하고

별들의 침묵에 귀 기울이고 있다

마당은 아침마다 발그레한 새살을 드러내고,

마당가에 찬밥처럼 남겨진 그제 내린 눈

쓸려나간 어둠과 함께 먼지 속에 갇혀 반짝인다 


목어는 유전(流轉)의 바다에 묶여 있는 배 한 척,

서서 죽은 어느 주목의 내세이기에

천 년의 세월을 뜬눈으로 견디는 것일까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시간의 빈 뱃가죽을 두드린다

아침 햇살이 풍경(風磬)에 닿아 쇳소리로 반짝이고

푸드덕, 하고 기침을 할 때마다

밤새 수척해진 처사의 얼굴에

작살처럼 주름이 꽂힌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같았다

웃고 있는 그는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실천문학사








겨울 옥탑방 - 박후기



일요일 아침

지붕 위의 방 한 칸

문을 열면 빈산 마른 가지에 얼굴이 찢긴

수척한 하늘이 밀려 들어오고

고추장 단지 위 소복이 쌓인 눈처럼

눈이 부어 오른 아내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은 채

세탁기를 돌린다 느릿느릿

텔레비전 속에서 기어 나온 나는

주인집 대문을 두드리는 중국집 오토바이 소리에도

허기를 느낀다 오래전

잎이 말라버린 화초는

썩은 이처럼 겨우내 뿌리가 욱신거리고

아픔을 참는 화분의 얼굴에

주름처럼 몇 줄 금이 간다

두꺼운 얼음장 같은 방바닥에 귀를 대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한 콘크리트 속

보일러 관을 구불구불 돌아 흐르는 물,

봄은 오고 있는 것일까

빨랫줄에 이불이 내걸리고

이불에 핀 모란의 볼이 발갛게 얼어붙는다

겨울 한 자락이 집게에 매달려

얼어붙은 생각을 펼쳐 보인다

언 이불에 이마를 대본다

차갑다

난간에 기대어 산 아래

잠든 개처럼 둥그렇게 웅크린 집들을 바라본다

기우뚱, 내려앉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집들은 힘겹게 비탈을 기어오른다






# 박후기 시인은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3년 <작가세계>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격렬비열도>, <엄마라는 공장 여자라는 감옥>, <사랑의 발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