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소나무 가까운 눈밭에서 - 유종인

마루안 2018. 1. 22. 19:01



소나무 가까운 눈밭에서 - 유종인



오래됐다고 모두 늙지는 않았다
미답(未踏)이 좋으니 미개(未開)도 좋다
소나무가 가까운 눈밭이니
노총각 노처녀들이 한 번씩 다녀갔다가 제 발자국이 아직 남았다
저녁답에 다시 와서는 서로 재장구치는 자리


거기 개 발자국과 새 발자국과 우둔한 내 발자국도
장문으로 비워 둔 흰 눈밭 귀퉁이에
발도장 낙관(落款)도 도사린다


나는 인정하고 싶은 거다
당신이 아주 멀리 있어도 내게 알려 오는 이 여백이
너무 새하야니 너무 그득한 침묵으로
다정한 슬픔만이 지워 가게 될 거라는 것을
백면(白面)에 뒹구는 햇살들은 아는 거다


보조개가 패듯 석어 가는 눈밭에
수천 갈피의 바람이 슬어 놓은 말들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꾹꾹 밟아 가는 거다
백발성성한 그대라면
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조금씩 세어서 좇아간다
어느 밤중엔 산자락을 내려온 너구리도 제 발자국에 발을 맞춰 보며
문득 코가 시려 별빛을 킁킁거리는가 보다
나도 이렇게 어질러진 눈의 이부자리에
겨우내 발자국이 뒹구는 것을 삶의 숙박부로 바라는 것이다



*유종인 시집, 숲시집, 문학수첩








석인(石人) - 유종인



베란다 밖 저 아래에 작은 바위가 있네
작업복 차림의 여름 사내가
급히 핸드폰을 받다 밀짚모자를 바위에 내려놓고 가네
어쩐 일인가
바위는 그때부터 나를 부르는 듯해
그가 여승(女僧)인가 싶다가도
몇 달 전 사별한 홀몸의 가을인가도 싶네
오래도록 뿌리 깊었으나
이제 그 뿌리에서 시린 강물 소리도 들리네
같이 가자구요 우리
먹먹한 가슴으로 일단 십 리(十里)만 뜨자 하네
아니 오 리(五里)쯤 가 버드나무 그늘 밑에
서로의 낯에 돋은 쓸쓸한 별을 더듬자네
세상은 다 집을 얻어 사랑을 들어앉히는데
밀짚모자를 눌러쓴 바위는
들판에 쓰러진 나무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어느 거룻배에 올라 손으로 강물 저어 가자 하네
사랑이 어디까지냐구요 어디까지인지
그걸 다 말하는 건 무엇이나 오류라네
한끝 간곡히 바위에게 묻으니,
죽음은 앞서 끝났고 사랑은 늦깎이라 이제 시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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