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좋다 - 이정록

마루안 2018. 1. 17. 21:27



내가 좋다 - 이정록



온천탕 귀퉁이
노인의 왼 어깨에 터를 잡은 초록 문신,
참을'忍'은 한자인데 '내'는 한글로 팠다
문신 뜨는 이도 '耐'란 한자는 쓸 줄 몰랐을까
이웃 나라끼리 한 글자씩 선린외교하자 했을까
한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면 두 글자의 터울은 몇살일까
등을 밀어드리는 내내 입술 근질거린다 민망하게 터진 웃음의 솔기
얼마나 많은 키득거림이 그의 얼굴을 구석으로 돌려놓은 걸까
혀뿌리에서 솟구치는 끝없는 치욕을 잘디잘게 토막쳐서
심장 속 칼날에 잘 벼렸을까, 돌아보니
'忍'은 비누거품에 들고 '내'만 훌쩍이고 있다


내는 깡패 아니다
내는 이런 걸 새기고 싶지 않았다
내는 한글도 잘 모른다 내는 한달에 한번 목욕탕 오는 게 좋다
내는 '내' 때문에 웃어줘서 고맙다 몸뚱이가 보배다
'내'가 없으면 누가 내를 쳐다보겠나
옷 입고 나가면 내는 다시 쓸쓸한 노인네다
젊은이들이 간혹 밖에서도 내를 알아보고 웃는다
내는 그게 비웃음으로 안 들린다 내는 저녁 같은 사람이다
그늘이 어둠이 되지 않게 나지막이 살아온 사람이다
내는 땅 한평 없는데 'LH사장님'이라고 불린다
내는 아이들이 별명을 불러줄 때가 그중 행복하다
'내' 할아버지다! 꼬마들이 윗도리를 벗어보라고 보챌 때는
팔뚝만 보여준다 내는 국민할아버지다
와, 알통이다! 내는 매일 팔굽혀펴기 한다
'내'가 내를 살린다
내는 '내'가 참 좋다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 이정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깃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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