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휘파람 여인숙 - 이기영

마루안 2018. 1. 16. 16:28

 

 

휘파람 여인숙 - 이기영 


그 많은 입들은 다 어디에서 왔는지
그 많은 눈동자들은 또 어디로부터 시작됐는지
소문의 진원지는 아무도 모르는 배후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씹어도 질리지 않는 공용의 레시피가 있고
누가 묵었다 갔는지 아무도 관심 없는 이 허름한 소행성으로부터
입들은 더 은밀한 입들을 따라 
빠르게 몰려들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떤 표정도 없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러니까 소문의 배역에는 
억울한 주연도 
빛나는 조연도 없는데
한때의 통속일 뿐인데 

모르는 척, 아는 척, 
번쩍거리는 수많은 가면과 한 패거리가 되고
갈아타야 할 타이밍만 남은 비밀 아닌 비밀을 품은 허기는
허기에 닿지 못한다

구석진 방에 온갖 상상과 몸부림치는 비애를 낳아놓고
그 많던 타인들은 또 어느 다정함 속으로 사라졌는지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천년의시작

 

 

 

 

 

 

희망 고문 - 이기영

 

 

아무런 전조 없이도 손톱을 물어뜯는 날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은 운명선이 갈라지고

어떤 날은 생명선이 끊어지고

 

아무 날이나 아무 감정 없이

나로부터 분리된 파동들이 진앙지로 몰려들었다

 

내게서 충분히 떨어져 있어도 흔들리던 당신에게 틈이 생겨 빗물처럼 내가 거기 스며들 수 있었다면 갈라지고 위험천만한 틈바구니에 끼어서라도 나는 아무도 모르게 뜨겁게 욕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호적인 입술처럼

 

특별한 관계를 암시하는 건 곳곳에 있었지만 단조롭기 짝이 없는 나날들, 정면에서 조금씩 엇나간 시선들, 공허하게 떠돌았다 어쩌면, 죽음보다 무자비하게

 

헛되이 가방을 쌌다 푸는 단층 너머로 끝내 답을 듣지 못한 어둠, 끝이 끝도 없는 간극을 혼자 건너갔다 돌아오곤 하였다

 

 

 

 

# 이기영 시인은 전남 순천 출생으로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했다. 제3회 전국계간지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첫 시집이다.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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