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 - 한창훈

마루안 2018. 1. 15. 19:21

 

 

 

간만에 꾸밈없이 날것으로 감동을 준 산문을 읽었다. 흔히들 산문 하면 온갖 미사여구 섞어서 자신의 삶을 꾸미기 바쁜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시를 좋아해서 특히 시인들의 산문을 자주 읽는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틈틈히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산문집은 울림이 없는 글이다. 그런 산문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면 구멍가게 아저씨가 속임수로 동네 아이들 코묻은 돈을 후리는 것과 진배 없다. 좀 이름 있다는 시인들이 출판사와 쿵짝을 맞춰 산문집을 쏟아낸다. 호갱이 휴대폰 가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창한 제목을 달았으나 감동이 없는 글은 공허하다. 그러고도 시인이란다. 안 팔리더라도 그냥 시나 쓰시지, 그러면 적어도 쪽은 안 팔리지 않겠는가. 시가 안 읽히는 것도 글은 못 쓰면서 얼굴 두꺼운 시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패전 처리 전문 투수는 필요해도 글 못쓰는 시인은 아니다. 그러고도 책이 안 팔리는 이유를 독자에게 돌린다.

한창훈은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거의 빼지 않고 읽는다. 나오자 마자 읽는 것은 아니지만 늘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 작가이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이 글에는 생생한 삶의 체험이 묻어 있다. 몇 줄만 읽으면 금방 느껴진다. 그냥 책에서 배운 관념적인 것이 아닌 펄떡펄떡 살아있는 글이다.

그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체험이든 아님 일부러 뛰어들었든 한창훈의 글에는 경험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원초적인 삶의 향기가 있다. 관상수로 영양제를 먹고 길러진 꽃은 화려하고 향기가 강하다. 그러나 빨리 시든다. 반면 들에서 스스로 살아남은 들꽃은 향기가 은은하면서 오래간다.

글도 그렇다. 한창훈의 글은 들꽃 향기가 난다. 그것도 무지 반항적인 향기다. 한창훈은 독자를 기다릴 줄 아는 작가다. 그래서 독자들도 그의 글을 기다린다. 작가들이 이슬만 먹고 사는 족속이 아닌 이상 독자와는 경제 생태계의 일부다. 작가는 쓴물을 쏟으며 글을 쓰고 독자는 단물을 빼먹고,,,,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