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 박순원

마루안 2018. 1. 12. 18:56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 박순원



감을 먹어라
감에는 비타민C가 많다
단감도 좋고 홍시도 좋고
곶감도 좋다
감이 좋다


다 지나가는 것이다
여자 둘을 만났는데
한 여자와는 사랑을 하고
한 여자돠는 결혼을 했다
다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감을 먹어라
비타민C가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푸른 감을 먹어라
익으려 애쓰는 감을 먹어라
왜 익으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푸른 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시집, 주먹이 운다, 서정시학








용문고시텔 - 박순원



나는 체구가 작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방은 손바닥만한 창이 있어서 다른 방보다 바싸다 창을 열었다 닫았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다 보면 하루가 간다 엎드려서 고개만 들면 동네 지붕들이 내려다보인다 비가 오는 오는 날에는 도둑고양이도 없다


끼릭끼릭 갈갈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공용 컴퓨터가 한 대 있는데 나는 지뢰찾기를 자주 했다 지금은 모니터도 나가고 마우스를 누가 가져갔다


LG 다니다 그만 둔 친구는 이혼하고 퇴직금을 녹여먹으며 뒹굴거린다 컴퓨터로 포커를 치는데 게임머니가 수백억이나 되었다 십만 원씩 받고 몇 번 팔아먹 었다고 했다 세 살 난 딸아이는 형 호적에 올려놓고 당분간 라면에 밥을 말아먹으며 궁리중이다


체교과를 나온 친구는 중소기업 다니다 짤리고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몸도 좋고 예의도 바르고 시원시원하고 술도 잘 먹었는데 술을 너무 먹다가 마누라에게 소환되어 떠났다 떠나던 날 한잔 더 했다


누가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면 건물 전체가 부르르 떤다 이불을 두 겹으로 감고 침대 위에서 함께 몸을 떨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계단 옆에 조그마한 샤시 문이 하나 있다 창고인 줄 알았는데 고개도 다리도 갸우뚱한 중늙은이가 손목에 노란 수건을 감고 런닝 팬티차림으로 벽 속으로 천천히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출렁출렁 사라졌다


우산을 잃어버렸다 일하는 아줌마가 '초록색 우산 개인 물건이니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세요'라고 써 붙였다 두 달째 붙어 있다 벽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웃집 지붕을 밟고 멀리멀리 가버렸는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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