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게 오는 사람 - 서안나

마루안 2018. 1. 11. 23:29



늦게 오는 사람 - 서안나



전생에 손에 피를 묻혔던 사람, 나는
당신과 세 번 헤어졌다


있다 나는,
없는 당신을 향해 손을 내민다
당신은 지워진 손
많이 낡았다
전생이 환하다


사람들이 천천히 밥을 먹는 저녁
내가 불러 놓은 마음의 무게로
서서히 몰락하는, 나는


그대는 늦게 오는 사람
실컷 울고 나자
당신의 얼굴은 가벼워졌는가
내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
꽃으로 도착하는
당신은



*시집, 립스틱 발달사, 천년의시작








탕진의 내력 1 - 서안나



점집 노파가 쌀알을 확 뿌렸다
여자를 떠나지 않겠노라 맹세했던
만세력 속의 사내를 점집 노파가 불러냈다
사내의 낡은 얼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귀신처럼 발딱 서기도 했다
떠난다고 이별이 아니다


상극(相剋)이라 했다
병든 몸이 병든 몸에 스며 있었다
여자가 놓아주면 사내가 붙잡고
동안 백발 되도록
달아나려는 다리와 잡는 팔로 얽혀진
흉괘(凶卦)라 했다
두 마리 비단뱀 형상이라 했다


몸을 천만 번 탕진하여
남자는 여자에게 흘러들었다
흐린 눈썹 그 아래
금이 간 사내의 눈
앵두처럼 피 묻은 별이 흘러내렸다
12간지를 되돌아온
사내가
만세력 속에서 썩고 있다






# 마치 절규처럼 느껴지는 시가 긴 여운을 남긴다. 시인의 말에서 서안나 시인의 시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누구는 어쩌다 시인이 되어 이렇게 힘든 시절을 견뎌야 했을까. 이것 또한 필시 유전임이 틀림없다.


죽은 나무처럼 않아 시를 쓰던 새벽

나는 어쩌자고 떠나온 별을

오래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을까

나는 비로소 고독에 가까워졌다

목백일홍과 동백을 유년의 정원에 심어 주신

부모님께 이 시집을 바친다   -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