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이칼에 새긴 - 강신애

마루안 2018. 1. 11. 16:19

 

 

바이칼에 새긴 - 강신애


일망무제 타오르는 분홍
노을의 첫 마음, 만년설의 고백

돌에 이름 새겨
바이칼 투명 깊이 던져 넣은 이 있으니
최후의 한 방울까지 바이칼은 소년의 첫 마음으로 저리 붉으니

그날, 빽빽한 자작나무 숲 사이 문득 마주친 곰도
백화피(白樺皮)를 긁던 주머니칼을 떨어뜨리고
얼어붙은 너의 표정을 기억하겠지

비뚤게 새겨진 이름은 수피에 돌돌 감겨
은빛 자작나무 되었으리

바이칼을 향해
의심 없이
목질의 눈을 뜨고 서 있으리
민물이 담긴 물일 뿐인데
영원히 발굴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가을은
살얼음 언 호수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어둡고 차가운 바닥에 떠도는 돌 하나를 건져 올린다

밑 모를 수심에 가해진 네 팔의 관성이 박혀 붉은

어안(魚眼)처럼 태허의 비밀과 사랑의 전모를
만곡으로 끌어안고 있는 돌을 꼭 쥐고
흡, 흡, 숨을 참으며 떠올라
내 앞에 가만히 펼쳐 보인다

축축한 작은 심장을


*시집,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문학의전당


 

 



가장 조용한 죽음 - 강신애


몽골에서
양을 잡는 것을 보면
사람 둘, 짐승 하나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한 사람은 뒤에서 양을 꼭 껴안고
한 사람은 앞발을 잡고
명치를 찔러
애인의 가슴을 움켜쥐듯 심장동맥을 움켜쥐고
가장 고통 없이 즉사시킨다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속삭이는 주인의 품에 폭 안겨
양은 한마디 비명도 없이
커다란 눈만 껌벅이고 있다

하늘의 솜다리꽃이
하강한 양

초원의 말발굽에 밟혀 진동하는 꽃향기처럼
제 몸 냄새를 들판에 퍼뜨리지만
에튀겐*에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용히 별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환생을 지켜보는 것 같다


*에튀겐: 몽골 대지의 신.

 

 

 

# 강신애 시인은 1961년 경기도 강화 출생으로 1996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불타는 기린>,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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