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참 미안한 일 - 김정수

마루안 2018. 1. 11. 22:33



참 미안한 일 - 김정수



오줌이 마려워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가로등, 그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어둠 속에서 갈등을 해소했다
잠시, 몽롱한 취기가 진저리를 치자
폭우가 잦아들었다 그때 눈에 들어왔다
찾기는 제대로 찾은 것이다
어둠 속 취중에도 변기를 찾은 것
담장 밑 화단에서 꽃을 피운 변기화분
얼마나 많은 날들 오물을 뒤집어써야
문밖으로 내쳐져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인지
환장하도록 환한 꽃 피워 느닷없는 취객의
발길 멈추게 하는 것인지
몸속에 흐르던 뜨거운 세례에도 끄떡없이
한 계절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인지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니 기왕 꽃을 피웠으면
그 옛날 똥 먹고 자란 감자나 고구마처럼
땡글땡글한 놈으로 맺었으면 좋겠다
따가운 갈 햇볕에 툭, 툭, 툭 힘자랑하는
콩알들 같았으면 좋겠다,
는 참 미안한 맘으로
가로등, 그 환함을 지나는 동안
힘 좋은 콩알들 내 가슴을 관통했다



*시집, 하늘로 가는 혀, 천년의시작








하루의 하루 - 김정수



옥상에 남아 있는 숨결은 불안해
나비 한 마리 타다 만 담배꽁초 연기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지


난간 모서리는 늘
허공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지


나 알아
세상은?


뜨거워 보지 못한 삶이라고
함부로 '짧은'이라고 말하지 마
단 한 번도 고요한 집을 가져 본 적 없지만
내 발은 항상 따스했어


직선은 떨어지는 비명을 사방에 던져 버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흔들리지 않는 수평으로 비상하겠지


중년의 삶은 너무 위험해
치명적인 높이를 정조준하고 있지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라고?
정지된 시간은 벽 속에 숨어있어


망설이는 시간은 왜 과거지향적일까
짧은 순간 잊고 싶었던 얼굴들이 종료되지 않은 하루의
문을 비집고 들어와
반쯤 열린 옥상의 문이 닫히면
바람에서 오랑캐꽃 내음이 날 거야


그거 알아
하루는?


오랑캐꽃 위에 포개지는
결 고운 날숨


허공이 나비를 날려 하루의
하루를 닫아 버려






# 모든 사람은 시인이라는 말에 동감하지 않는다. 모든 시인이 시를 잘 쓴다는 말에도 동감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다. 어렵지 않은 어휘로 중년의 애환을 잘 그려낸 시가 마음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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