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시 스무 살 - 윤향기

마루안 2018. 1. 12. 19:39



다시 스무 살 - 윤향기



가난이라 말할까
친구로는 해결되지 않는 이 공백을
열병이라 말할까
홍역처럼 저 홀로 발열하여 피를 저리게 하는 것을
그릇가에 남는 소금끼처럼
구체적으로 누가 그리운 건 아니다
옆좌석의 선명한 부재가 쓸쓸할 뿐
볼륨을 높였다
베빈다의 파두가 구슬프게 폐부를 찌르며
깎아놓은 감자처럼 변색한 나의 심장을 관통한다
아리고 아려 더 이상 차를 몰 수 없을 것 같아
갓길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켜자
마음을 아리던 시간들이 부서져 내렸다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다 미끄러진다
소나기가 마음을 가로질러 간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아버린 나이에
스무 살 때 경멸하고 외면했던 것들을 사랑하게 될 줄이야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시집, 엄나무 명상법, 문학아카데미








길 - 윤향기



보이는 것 모두
길 아닌 것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새로운 길이 궁금하여
이쪽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늘 저쪽 길을 갈망했습니다
한때는 행복한 휘파람을 불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아무나 찾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길에서 오래 머물 순 없었습니다
되도록 높이 바라보며 멀리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해시계의 그림자가 닿는 곳까지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보았습니다
길이란 길 속에서 찾는 게 아니라
마음 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운 사람은 함께 걸어도 그립고
가슴에 있는 사람은 함께 있어도
보고 싶다는 것을





# 내게도 스무 살이던 때가 있었다. 어느덧 그곳에서 30년이 훌쩍 지난 세월, 이런 시가 마음을 아련하게 한다. 푸르게 빛나던 그 때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다시 갈 수 없지만 추억마저 없다면 얼마나 인생이 삭막하겠는가. 젊어는 보았으니 이제 늙을 차례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의 역사 - 전윤호  (0) 2018.01.13
먼 길 - 안상학  (0) 2018.01.13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 박순원  (0) 2018.01.12
늦게 오는 사람 - 서안나  (0) 2018.01.11
참 미안한 일 - 김정수  (0) 2018.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