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치명적은 부재 - 여태천

마루안 2018. 1. 11. 13:07

 

 

치명적은 부재 - 여태천


나는 이제 암흑의 허공에 앉아 당신을 본다
그것은 어쩌면 부재의 사태

총천연색이 단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는 순간
흑백의 표면으로부터 길게 종적을 남기며 빛이 날아오른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소문의 꼬리가 불태환(不兌換) 기호처럼 여기저기 떠돌고
영원히 떠나지 못할 사태의 기억만이
당신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시간

사각사각 소리내며 내 몸을 빠져나가는 에네르기
난 느리게 세상을 살아왔으므로
당신의 외출이 언제까지인지 모른다

돌아오지 않을 당신을 기다린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당신의 말을 간절히 믿었으므로
머지않아 나는 고독해질 테지만

정전(停電)의 순간
움직이는 것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
이 허공에서 허락받은 짧은 침묵을 위해
난 그저 맨얼굴로 당신 앞에 서 있다

조금씩 당신의 나라로부터 멀어지고
그때, 모든 장면들은
빛이 사라지는 것으로 완료될 것이다


*시집, 국외자들, 랜덤하우스중앙

 

 




익숙해지는 법 - 여태천


꽃무늬 벽지 속에 갇혀 4시에서 8시까지
꽃술을 마시고 있네
너무 오래 잔을 들고 있었던 걸까
나의 작은 손은 볼품없이 자꾸만 떨리는데
무슨 상관이야 있겠는가
겨울이란 추운 계절이므로

밖에 누군가 느려빠진 유행가를 부르고 있나 보다
저렇게 조용히 노래를 부를 수 있다니
기다림이란 상대와 관계없이 조급하고
노래는 겨울이 되면 더 지루해지는 법이지
꿈도 꾸지 않았지만 지금 나는
이 방과 함께 취하는 중이므로

언제부터 나의 쥐색 외투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일까
반쯤 남아 있는 술잔을 비우면
겨울을 재촉하는 노래와
투명하게 거리를 쓰다듬고 있는
바람의 소리가 들리지

넓은 낯짝의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그를 알아볼 수는 없었네
주름지고 힘없어 보이는 그의 입술이
뭐라고 말을 했지만 들을 수도 없었네

이 방은 작고 지루하게 유행가는 들리고
그는 너무 크게 보이네
무슨 상관이야 있겠는가
지금 나는 취하는 중이고
겨울이란 여전히 추운 계절인데

 



*시인의 말

오랫동안 말들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찬사와 영광은
항상 멀리 있거나
우연히 뒤에서 오는 법.
너무 앞서 걸어본 적도
자살을 꿈꿔보지도 못한 나는
다만 저 불확실한 생의 순간들을
기록했을 뿐이다.
이제 운명에 대하여.
믿음이 만드는 헛것들 앞에
내내 피로했던 나는
홀연히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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