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의 궤도 - 현택훈

마루안 2018. 1. 8. 18:45



사랑의 궤도 - 현택훈



그곳이 강원도인지 충북 어디인지 말하지 않겠다
지명을 말해버리는 순간
별들이 다 흘러가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곳은 별들의 안식처이자 별들의 뒷골목이다
그러니까 나는 별들의 무덤이 있는 계곡에 갔었다
가끔,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저 기억들은 다 어디로 떨어지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향해
몇 날 며칠을 찾아가다
마침내 별똥별이 떨어지는 곳까지 갔던 거였는데
저녁이 다 되어 도착한 그곳에서
민박집에 방을 잡고 물소리를 따라 들어간 계곡에는
가혹하게 아름다운 별들이 수장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도 당연하게 나의 슬픔은 여전히 강건해서
나는 물에 손을 담그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손바닥 안으로 별들이 송사리들처럼 들어왔다
밤하늘엔 치정극 같은 별들이 여전히 반짝거리고
나는 묘비도 없는 별들의 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행성주기에 따라 다시 풀숲을 헤치고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엔 모처럼 금세 잠이 들었다
꿈에 당신이 나왔지만
그 얘긴 이제 그만하련다.



*시집, 남방큰돌고래, 한국문연








사랑의 후예 - 현택훈



어쩌면 내 몸속에
목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아
게르에서 잠을 자고 큼지막한 별이 뜨는
몽골에 가고 싶어
고려 때 한 처녀가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데
목호가 손목을 잡았을지도 몰라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가 태어났다면
이 더러운 피를 욕할 수도 있지만
그 피가 내 피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목호의 후예인 거야
내가 몽골의 한 평원에서
볼 빨간 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
나는 말할 거야
나도 몽골 사람이라고
그때 그 더러운 피가 사랑의 피로 끓겠지
사랑이란 그런 거야
가고 싶은 나라 같은 것
내 몸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다시 돌아 끓어오르는 더러운 것
조국에 대한 그리움보다
먼 이국에 대한 동경
너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
안녕,
볼 빨간 소녀야





# 쉬운 어휘를 가지고 흡인력 있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탁월한 시인이다. 마치 섬세한 세공사가 보석에 무늬를 새기듯 언어 사이에 놓인 따뜻한 시선에서 시인의 심성을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시인은 아주 짧은 새끼손가락을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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