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 김충규

마루안 2018. 1. 7. 19:32



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 김충규



유리창에서 바람이 미끄러진다
먼 곳에서 우리집 쪽으로 하염없이 밀려와
발코니 유리창에서 그만 미끄러진다
저 바람의 숙박은 대체 어디여야 하는가
한때 내가 나를 들판에 버려서
어디 향할지 몰라 허둥거리던 영혼을 보는 듯
기실 저 바람이란 누군가의 영혼이 떠도는 것인지 몰라
유리창에 부딪혀 피 흘리는 바람의 영혼이 측은해
눈길을 피한들 내 영혼의 숙박이 온전한 건 아니다
영혼이 매일 변신을 거듭한다면 모를 일이나
저리 미끄러진 바람은 절룩일망정 변신하진 못할 것이다
바람의 육체가 수시로 변한다고 믿는 건
사람의 어리석음일 뿐
한번 얻은 육체는 바람도 사람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하여 서럽기도 하고 생이 두렵기도 하고
유리창에 미끄러지기도 하는 것
저렇게 살다 죽더라도 바람이 묘비명을 남길 일은 없듯
내 가련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묘비명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저 세상이라는 유리벽에 반복적으로 미끄러지다
일생을 훌쩍 허비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앞을 가로막은 유리창을 원망할 필요는 없는 것
바람은 바람 없는 영원의 숙박을
사람은 사람 없는 영원의 숙박을
그나 나나 사후(死後)는 그리 고요하면 그만



*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문학동네








불행 - 김충규



썩은 냄새 풍기는 사과를 버리고
쭈글쭈글한 할미를 버리고
술이나 마시는 오후입니다
자학한 만큼 구름이 부풀고
울음을 내놓은 만큼 홀쭉해진
새가 허공에서 문득 비행을 멎습니다
추락은 광기입니다
무엇을 광고하려고 새가 추락하는 건 아닐 텐데요
최후는 찰나이고 고요합니다
너무 고요해서 쭈글쭈글한
할미가 탱글탱글한 처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해도 무심히 쳐다볼 것 같은 오후입니다
죄(罪)를 키워서
내 몸은 참호가 된 지 오래입니다
내 몸이 옥(獄)이고 내 생활이 유배입니다
날개를 갖지 못한 것이 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날개를 가졌다면 허공에서 나는
참혹한 광경을 광고했을지도 모릅니다
날개 없음을 불행이라 여기진 않지만
술을 마셨는데도 전혀 취하지 않는 이 오후를
벌레처럼 짓이기고 싶습니다
이런 내가 징그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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