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절반만 말해진 거짓 - 신용목

마루안 2018. 1. 6. 18:15



절반만 말해진 거짓 - 신용목



이제 놀라지 않는다
새가 실수로 하늘의 푸른 살을 찢고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나무들의 짓이라고
오래전 내가 청춘의 주인인 슬픔에게 빌린 손으로 연못에 돌을 던졌던 것처럼
공원 새들을 모조리 내던지는
나무들,
서서 잠든 물의 무덤들


저녁의 시체들
가을이 새의 울음을 짜내 신의 예언을 죄다 붉게 칠했으므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그날, 마지막으로 던졌던 반지의 금빛 테를 가진 달빛조차도
손목을 그은 청춘의 얼굴로 늙어가니
집으로 돌아가
최대한 따뜻한 밥을 하고 무국을 끓여 상을 차리고
마음을 지우고 나면,
남는 자신을 앉히고


눈에서부터
긴 눈물의 심을 빼내기라도 한다면 구겨진 옷가지처럼 풀썩 쓰러질 자신을 향해
밥그릇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로,
걸어가거나


형광등 빛을 펴 감싸주며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온몸 뜨거운 물에 흠씬 적신 뒤 뿌옇게 김 서린 거울을 훔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네 몸이 아프다
네가 내 몸을 앓듯이
그러니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있어서


물끄러미 나라고 이름 붙인 장소에서 가여운 새들을 울음 속으로 날려보내며
중얼거린다
절반만 거짓을 믿으면
절반은 진실이 된다고,
어쩌면 신은 우연을 즐기는 내기꾼 같아서 하나의 운명에 보색을 섞어 빙빙 돌린다
그러나


여름을 윙윙거리던 공원의 벌들도 열매가 꽃의 절반을 산다고 믿지 않는다
꽃이 열매의 절반을 가졌다고도
믿지 않지
다만 우리가 별들의 회오리 속에서 청춘을 복채로 들었던,
모든 예언은 절반만 말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 나머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삶이 아프다는 것


이제 놀라지 않는다
모든 나무가 지구라는 둥근 과녁을 향해 날아든 신의 화살이었다 해도
우리가 과녁의 뚫린 구멍이라고 해도,
뽑힌 나무라 해도


나무는 자신의 절반을 땅 속에
묻고 있으므로,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밤을 견디는 것처럼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








공터에서 먼 창 - 신용목



내가 가장 훔치고 싶은 재주는 어둠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저녁의 오래된 기술.


불현듯 네 방 창에 불이 들어와, 어둠의 벽돌 한장이 차갑게 깨져도
허물어지지 않는 밤의 건축술.


검은 물속에 숨어 오래 숨을 참는 사람처럼,


내가 가진 재주는 어둠이 깨진 자리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 슬픔의 오래된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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