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마루안 2018. 1. 5. 19:50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열림원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 오래된 시집을 다시 들추다 이 시가 눈에 들어온다.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었던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1997년 창작과비평에서 나왔을 때 이 시의 제목이 그리운 부석사라는 걸 알았다. 정호승 시인은 시선집을 자주 낸다. 그리운 부석사도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수선화에게>까지 실렸는데 더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시인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이 시를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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