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중년, 편두통을 위하여 - 백인덕

마루안 2018. 1. 5. 18:10



중년, 편두통을 위하여 - 백인덕



나이 들어
소심한 삶의 희망이라는 게
제발 편두통이나 앓아 봤으면,
펜잘, 게보린 뭐 그런 알약 꾸러미를
헌 가방 깊숙이 넣어 다니다가
왁자지껄 술자리 맨 구석자리
냉수 한 컵 정한수처럼 모셔 뜸들이다가
무슨 죄악이나 특권처럼 그 알약 털어 넣고
오래 오래도록 약맛이나 봤으면,
혹 눈치 빠른 일행이 있어
'어디 아프세요?' 빈 술잔을 들고 머뭇댈 때
'요즘 골머리가 좀 아파서...'
말꼬리 흘리며 헌 가방을 움켜쥐면
'그 인간, 나이 들어 제대로
죽으려고 이제 공부 좀 하나보네!'
싱겁고 얄팍한 오해라도 받아 봤으면.
나이 들어 철지난 삶의 회한이라는 게
손톱 반만 한 위안을 위해
제 몸조차 던지지 못했다는 것.
비운 밥그릇, 빠진 머리칼로 겨우, 겨우
제 생의 수체 구멍이나 막았다는 것.
그로 인해 세계를 슬슬 더디 가게 했고,
지구 자전축을 조금 기울였다는 것.
노심초사가 너무 많았다는 것.



*시집,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문학의전당








세밑, 어설픈 일기 - 백인덕



슬슬 허기가 일면
창밖은 한창 눈이거나 비,
읽던 책은 겨우 서문이거나
뒤표지 정도,
끝물의 취기,
시작되는 한기,
오늘이 며칠일까?
흐린 눈 비비고 바라보면
어김없이 월말이거나 월초, 이미
약속은 넘겼거나 무의미해졌기 일쑤.
슬슬 허기가 생 상처를 건드리면
아득한 정신에 밀리는 마른 살점들,
때때로 서로를 보듬고 흩어져 날려
빈 방에 헛것,
취한 정신의 빈 몸,
빈 방 빈 몸에 딱지 앉은 상처,
점지(點指)를 확인한다.
참 가려운 것들,
더욱 가벼운 것들,
끝끝내 가여운 것들만
한 무더기 가라앉힌다.
어쩌면 시도 때도 없는 이 허기를
여백(餘白)의 시보다
시간보다
더 사랑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끝내 허기로 밀고 가는 끝물의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