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 - 최금진

마루안 2018. 1. 3. 21:35



로또를 안 사는 건 나쁘다 - 최금진



로또가 얼마나 끔찍한 악몽인지
로또방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끝자리를 분석하거나 홀수 짝수를 조합하는 일은
어느 사무직과 다르지 않다
왜 사느냐, 를 왜 로또를 사느냐, 로 이해해도 무관하다
이 늦은 밤에 왜 또 여기로 왔는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을 쓰레기통에 구겨넣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찍는다
로또를 사지 않는 10%의 고소득층은 얼마나 좋을까
로또를 사지 않아도 천사가 지켜주니까
왜 사느냐, 를 묻지 않아도 되니까
오십이 넘은 사내는 누가 볼까봐 손을 가리고 찍는다
술 냄새에 절어 들어온 사내는 앉자마자 묵상을 한다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은 줄을 서지 않는 자들을 무섭게 흘겨본다
순서를 어기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앞서 가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우울한 일
집착은 때 묻지 않은 종이와 같아서
싸인펜을 쥐고 있으면 또 한번 막막해진다
예수님울 부르고, 조상님께 기도하고, 아이 생일을 떠올리며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이라도 달듯
쩔쩔매며, 굽실거리며
두툼한 돈뭉치를 한번이라도
멱살처럼 움켜잡아보고 싶은 자들에게
왜 사는가, 왜 로또를 사는가, 묻지 말자
로또를 안 사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죄질이 나쁘다
그게 비록 종잇조각에 불과할지라도
뭔가를 간절히 빌어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꼭 당첨되세요, 주인 남자의 빈말은 그 어떤 복지정책보다 낫고
코미디 프로는 복권 추첨 프로와 같은 시간에 나오며
주말이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로또방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절망을 배당받는다
주위를 흘끗거리며, 헛기침을 하며, 창밖 사람들을 노려보며



*시집, 황금을 찾아서, 창비








원룸 생활자 - 최금진
 


국화 한 뿌리 심을 데 없는 가상의 땅에 전입신고를 하고
라면을 끓여먹다가 쫄깃쫄깃한 혓바닥을 씹는다
파트타임 일용직, 조각난 채 주어진 어느 휴일 아침엔
거울을 보며 낯선 서울 말씨를 연습한다
화분에 심은 쪽파는 독이 올라 눈이 맵고
빛이 안 드는 창문엔 억지로 한강의 수로를 끌어들인다
실업수당도 못 받은 개나리들이 대책 없이 황사 속으로 출근할 때
누런 걸레 같은 목련이 창문을 닦아내느라 팔목이 홀쭉하다
우리 내일도 만나세, 경로당 노인들은 녹슨 철사 같은 몸으로
오늘의 악수를 내일의 화투짝에까지 잡아보지만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은 사회복지사의 일일 뿐
저녁이면 강에 나가 돌을 던진다
돌멩이가 날아가 떨어지는 지점마다
정신 착란의 야경 불빛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앉는다
정부의 면죄부가 가끔은 공짜 쿠폰처럼 발행되어도 좋을 텐데
투명한 유리컵에 양파를 심으면
이렇게 독거노인으로 살다 죽을 것 같은 노후가
가느다란 실뿌리처럼 아래로 자라는 걸 본다
땅속으론 지하철이 무덤 같은 터널을 돌아다니고
휴대폰에 뜨는 대출 메시지를 지우다가 모르고 자신까지 지운다
종로에 사과나무를 심자고 노래했던 가수는 곧 환갑이고
사과 한 알씩을 모두에게 나눠준다면 그는 시장이 될 것이다
오래 묵은 기침은 구겨진 빨래처럼 방바닥에 쌓이고
희망은 결국 자기암시일 뿐이라는 캄캄한 결론을 베고 누우면
꼭 불 꺼진 성냥개비 같을 것이다, 원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