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빈 자리가 가렵다 - 이재무

마루안 2018. 1. 5. 17:04



빈 자리가 가렵다 - 이재무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 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인데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더 깊어지는 욕망,
죽음도 이제 진부한 일상일 뿐이어서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표정을 짓고 우리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죽음의 세포가 맹렬히 증식하는 밤
빈 자리가 가려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룬다

 


*이재무 시집, 저녁 6시, 창비








신발을 잃다 - 이재무



소음 자욱한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한참을 즐기다 나오니
아직 길도 들지 않은 새 신 종적이 없다
구멍난 양심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다가
혈색 좋은 주인 허허허 웃으며 건네는
다 해진 신 신고 문 밖으로 나오는 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
바람에게도 화풀이를 하며 걷는데
문수 맞아 만만한 신
거짓말처럼 발에 가볍다
투덜대는 마음 읽어내고는 발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한 게 여간 신통하지 않다
그래, 생이란 본래
잠시 빌려쓰다 제자리에 놓고 가는 것
발과 신이 따로 놀다가
서로를 맞추고서야 신발이 되듯
불운도 마음 맞추면 때로 가벼워진다
나는 새로워진 헌 신발로 스스로의 다짐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에 도장 꾹꾹 찍으며
대취했으나 반듯하게 집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