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삶의 거처 - 백무산

마루안 2017. 12. 30. 22:01



삶의 거처 - 백무산



강이 어디에 있냐고 그가 물었다

길을 묻는가 해서 내가 되물었다

이리 쭉 가면 다리가 나오느냐고 다시 물었다

비닐 가방에 때 절은 작업복

거친 손에 머리는 반백인 사내


늦가을 찬바람 안고 돌아서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모든 걸 잃은 사람에겐

사람의 체온이 종교다


저들의 탐욕과 음모와 속임수로

숱한 사람들 찬 거리로 내몰렸지만

우린 또 기억한다 그 숨막히던 날들

모두가 졸부가 되던 뻔뻔스럽던 날들

모두가 모두를 소비하고 내다 버리던 날들


그 사람 앞에 앉아 나도 밥 한 그릇 받는다

어쩐지 목숨 비치는 국밥 한 그릇 받는다

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목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시집, 초심, 실천문학사








섣달 그믐 - 백무산



해가 또 간다 섣달 그믐날 그래도 밀린 때는 벗고 가야지 동네목욕탕 북새통 사람들 틈에 몇 바가지 땟물이라도 끼얹어야 세월 손님 맞을 게 아닌가


내 옆에 앉아 씻고 있는 쉰이 좀 넘어 보이는 남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에게 각별하다

아비는 벌써 낡았다 무슨 고생을 지지리도 했는지 엉덩이는 늙은 호박덩이 같고 얼굴은 핏기 없이 버섯처럼 말랐다 여기저기 몸에 상처가 뱀처럼 감겼다 자지는 벌써 이빨 나간 연장 같다


아들 녀석은 어린 것이 아랫배가 나온데다 희멀거니 피둥피둥 살이 쪄 아비 가까이 서 보니 필시 아비의 뚜껑을 열고 홀딱 빨아마신 듯했다 그 피둥피둥한 놈은 손가락으로 여기 아니 저기 하면서 몸을 비틀고 아비는 땟수건을 놀리며 그래 응 그래 바쁜 손놀림이 꼭 도련님 모셔온 몸종이다


내가 몸을 다 씻을 때까지 그 피둥피둥한 놈 씻기느라 미라처럼 마른 아비는 땟국물이 그대로다 내가 옷을 다 입은 뒤 그들이 나왔다 아비는 또 그 피둥피둥한 놈의 몸을 닦아주고 머리를 털어주고 귀도 후벼주고 음료수도 먹이고 발톱도 깎아주고 그새 그 피둥피둥한 놈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느라 아비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밤은 어두워졌다 눈이 온다고 하더니 비가 내리고 바람이 좀 불 거라더니 태풍인 듯 세다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새천년이 온다고 등 뒤에서 그 피둥피둥한 놈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바를 벗어 아비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다정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거리에는 늦도록 불이 밝다 해가 또 가는데 나는 역사를 얼마나 믿고 있는 것일까 나의 이 낡은 믿음을 지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 백무산 시인은 1955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1984년 민중시 1집에 연작시 '지옥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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