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무 많이 속고 살았어 - 박세현

마루안 2017. 12. 28. 18:52



너무 많이 속고 살았어 - 박세현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
30년 만에 소집된 얼굴들을 만나니 그 낮짝 속에
근대사의 주름이 옹기종기 박혀 있다
좀이 먹은 제 몫의 세월 한 접시씩 받아놓고
다들 무거운 침묵에 접어들었다
화물차 기사, 보험 설계사, 동사무사 직원, 카센터 주인, 죽은 놈
만만찮은 인생실력들이지만 자본의 변두리에서
잡역부 노릇 하다 한 생을 철거하기에
지장이 없는 배역 하나씩 떠맡고 있다
찻집은 문을 닫았고 바다도 묵언에 든 시간
뒷걸음치듯이 몇몇은 강문에서 경포대까지
반생을 몇 걸음으로 요약하면서 걸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던 간밤의
풍경들이 또한 피안처럼 멀어라



*시집, 사경을 헤매다, 열림원








동시신호 앞에서 - 박세현



남자 나이 마흔다섯
써놓고 보니 뽕짝이다
내가 일흔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몇 퍼센트
전자계산기 어디 있지?


원주시청 앞 사거리
부슬부슬
저음으로 가라앉는 비


용서할 수 없었던 몇 가지 일들을
그냥 용납하기로 한다
날씨 탓일까 철이 드는 때문일까


동시신호 앞에서 내 길이 아닌
좌회전길을 곁눈질하며 넋을 놓다가
뒷사람의 지청구에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니 차가 꿀꺽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삶이
길바닥에 주르르 쏟아진다





# 며칠 전 송년회 모임에서 친구 하나가 말했다. 요즘 이따금 영영 사라지는 사람들이 생긴다고,,는 늑대처럼 살아남겠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안 보이는 사람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는 것,, 늑대처럼 살아남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