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 일간의 눈꽃 - 나호열

마루안 2017. 12. 29. 21:41



백 일간의 눈꽃 - 나호열



가부좌를 틀고 동안거에 들었다
이제 그는 예고 없이 와서
이유 없이 떠나간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작정이다


느닷없이 다가온 겨울과 함께
몇 편의 단편소설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고
촛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얼굴을 마주 보는 밤도 있었다
웃음은 작은 물의 입자들이 만들어 낸 상고대처럼
순간 빛나다가
아침이 되면 문장을 흩트려 안개로 사라져 갔다


인적이 끊긴 그의 등은 한 뼘 더 솟아올랐고
촛대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돌아앉은 그의 상념 속에 불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식의 욕망이 향기를 이루고 자태를 어루만지는가
잎 지고 꽃이 시들고 혹은 열매로 맺는 화염 속에 들어앉아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발자국소리를 듣는 밤


향기도 없고 빛도 없이
다만 이 세상에 태어난 첫 말이 되어
눈은 무량무량 내렸다
꽃이 되었다
 

그의 등 뒤로 숨죽인 작은 발자국 오던 길 되돌아가고
저기,
저어기 겨울 산이 서 있다



*시집, 촉도, 시와시학








가슴이 운다 - 나호열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예정되어 있으나 슬그머니 뒤로 밀쳐 놓은
정답이 없다고 스스로 위안한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달려드는 파도가 있다


못질 소리
똑딱거리는 시계의 분침 소리
바위가 모래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


이 나이에 사랑은 무슨
이 나이에 이별은 무슨
가슴이 울 때에는
이미 살아온 날들보다 더 많은
혀를 닮은 낙엽이
길을 지우고 난 후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은
그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슬픔인 까닭
짐짓 잊어버릴 수 있을까
세상을 엿보았던 커다란 오해를 받아들인 까닭


가슴이 운다
높은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바람 앞에 속절없이 속을 내놓듯이





# 나호열 시인의 시는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다. 읽어도 쉽게 단물이 빠지지 않는 시가 많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되면서도 곰곰히 생각하게 만드는 싯구가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시집에 실린 자서가 천상 시인임을 확인시켜 준다.


자서


아직도 자폐(自閉)와 유폐(幽閉) 사이에 걸린 세월을 꿈꾸듯 걷고 있다.
외롭지 않으려고 뒤로 걸었다는 사람의 그 발자국을 시로 읽으며
종심(從心)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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