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초겨울 오후 - 이창숙

마루안 2017. 12. 23. 18:39



초겨울 오후 - 이창숙



흐릿하다
간간이 햇살이 나더니 지금은
바람 불고
나무들의 어깨가 흔들리고
발길에 채이다 몸 웅크린
우울증에 걸린 개
같은 오후
개 같은 날씨가 딱
맞는 오후
어슬렁거리며 골목길을 지나는 바람
한 마리의 작은 짐승, 사람 자취
정신을 흩어놓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앞집 울안에 서 있는
키 큰 오동나무도 생각할 게다
깃발처럼 펄럭이던
너른 이파리를 마른 지상에 다 떨궈 놓고
지난봄 연둣빛 휘파람 소리로 키워 낸
잔가지들의 흔들림에
'아프다. 팔이 아프다'
단단한 몸속으로 까실한 바람 들이칠 때마다
핏줄 멎는 팔목 하나씩을
겨우내 긴 울음으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바람이 불고
나무들의 어깨가 흔들리고
키 큰 오동나무의 침묵 속으로
흐릿한 오후가 저물고 있다
개 같은 오후



*시집, 바람든 무 내 마음에게, 눈빛








시간에게 - 이창숙



1.
살아간다는 건
살다가 가는 거라고 하대
네게 가는 길은 언제나 가볍다
낯설고 낯익은 길이어서
살아 있으면서 가끔은
내가 부서져야만, 쪼개져야만, 삶의 파편이
흙 속에 묻혀져야만
내게 남겨 놓고 간
너의 웃음 멎은 발자국을 따를 수 있다고
네게 갈 수 있다고


2.
겨울밤은 차고 깊은 강물이다 하늘엔
시리게 눈물 반짝이는 성근 별이 떠 있고
잠들지 않는 목숨 하나 지켜주는
길모퉁이 불빛 매단 전신주는 오늘도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어두운 강물 위에
꼿꼿이 서 있다
지금도 찬 유리문 너머로 떠나는 너를
손 저으며 한 걸음씩 보내주는 날
잘 가게, 친구여
살아간다는 건
살다가 가는 거라고 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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