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퇴적 공간 - 오근재

마루안 2017. 12. 23. 19:32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늙는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 언젠가부터 나는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다. 후레 자식! 너는 안 늙을 줄 아느냐고 힐난할지 모르나 내 마음에서 노인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도 일종의 차별이다.

나이 먹은 사람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한다. 주변에서 매사에 목소리부터 높이는 진상 노인을 목격하는 일이 너무 흔하다. 연륜이 쌓일수록 너그러워진다는데 그 반대로 포용심은 늘지 않고 심술만 늘었다.

젊을 적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넥타이를 매던 직장인들이 예비군복 하나로 행동이 바뀌는 걸 봤다. 아무 곳에나 소변을 보고 조교의 교육 지침에 딴지를 걸기도 한다. 구별되지 않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벼슬인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노인들은 조금만 불편하면 너 몇 살이냐, 너는 안 늙을 줄 아느냐, 애비 에미도 없느냐는 등 언성부터 높인다. 이 말을 그들 또한 젊었을 때 어른들에게 귀가 아프게 들었을 것이다.

 

모진 시어머니 밑에서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이 먹으면 같은 시어머니가 되듯이 말이다. 젊어봤기에 더 이해하지 않으려는 심보일까. 퇴적 공간, 한자의 뜻을 정확하게 알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제목이다. 노인 문제를 다룬 제목으로 가장 적합한 단어라 해도 되겠다.

 

저자는 꽤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학자처럼 보인다. 글을 읽다 보면 그 사람의 세상 보는 방향이나 서 있는 자리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대로 궁핍하지 않게 지식인 대접 받으며 잘 살아온 인생이다.

<이 시간에도 노인들은 탑골공원에서, 종로 시민공원 광장에서 시간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전반부에 실린 이 구절이 훅 치고 들어오면서 책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광의 시절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시대의 강물에 떠밀려 잉여의 존재로 퇴적 공간에 쌓여 있다>. 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그래서 이 책은 제목처럼 강의 상류에서 떠밀려 내려 하류에 쌓인 모래섬과 같은 퇴적 공간을 탐사한 기록이다. 저자는 요즘 노인들이 머무는 공간을 적나라하게 탐사했다. <탑골공원이나 종묘공원에서 잡담으로 시국 강연으로 바둑 장기 아니면 박카스 아줌마와의 담소로 하루의 시간을 물 쓰듯 쓴다>고 말한다. 그들은 <노년의 황금기를 시간을 낭비하며 보낸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한때는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어르신으로 불리는 경계를 말한다. 그러나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은 어르신은 그 호칭이 되레 불경이다. 차라리 나잇값 못하는 어르신보다 그냥 사람으로 불리는 게 낫지 않을까. 호칭 바꾼다고 없던 공경이 생길 것인가.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어느 교회 급식소에서 만난 80대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미래가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는 점은 분명해요. 노인네들이 너무 거칠고 교양이 없습니다. 거칠다는 건 자기 자신을 아낄 줄도 모르고 타인도 보듬으려는 따뜻함이 없다는 뜻 아니겠어요?>  이 말이 참 송곳처럼 박힌다. 노인이 본 노인의 현실을 제대로 진단한 것이다.

<국가가 모든 개별자를 상대로 책임지려는 무모함으로부터 벗어나 가정과 공동체와 더불어 그 부담을 나눠지려는 정책으로 복지 문제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무엇보다 급식이든 프로그램이든 자신의 몸을 자기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정상적인 노인들에게 제공하는 무료제도를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혜자인 노인들을 비루하게 만들고 사물화하며 자생력을 잃게해 결과적으로 사회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저자의 최종 진단은 이렇다. 나는 이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너무 높은 현실이고 빈약한 복지는 점차 늘려야 한다. 그리고 노인 복지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종묘와 탑골공원에 모이는 노인들은 변화의 내용보다 변화의 속도에 충격을 받아 시대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대가 남기고 간 잉여 인간의 집합'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으로 저자는 마무리 한다. 조만간 노년에 접어들 오십대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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