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름에 대하여 - 최서림

마루안 2017. 12. 22. 21:10



이름에 대하여 - 최서림



고비사막에 가면
<이름없음>, <죄없음>이란 이름들이 있다.
성(姓)이란 굴레도 없이
<꽃>이나 <강>이란 이름도 있다.
바람처럼 물처럼
매이지 말고 살라는 뜻이렷다.


하지만 지상에서 누군들, 때론 그 이름이
무겁고 버겁지 않으랴. 강아지 이름처럼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 있으랴.
때론 그만 내려놓고 싶지 않은 이름 있으랴.
아무리 하찮고 가볍게 산 인생에게도
지리한 그 생애가 끝나야
비로소 이름도 쉼을 얻는 것.


아무도 불러주는 이 없는
비루한 이름 석 자에도
현대사에 맞먹는 피와 노역이 담겨 있다.
기록되지 못할 이름일수록
범접하기 어려운 데가 있는 법.


저기 이름 없는 야생화모냥
쓸쓸하고 찬란하게,
한국사만큼 파란만장했던 한 생애가 마감하고 있다.
죽어서도 쉼을 얻지 못하는 이름보다 더 무겁고 값진
이름 하나가



*최서림 시집, 구멍, 세계사








고비에서는 - 최서림



꽃도 새도 즐거이
젖고 있다
들나귀도 사람도 그냥
기도하는 마음으로 비를 맞고 있다
젖어 있는 것들을 해가 말려주고
무심한 바람이 펴준다
고비에서는
고비에서만 고여 있는 세월 안에서
모든 것들이
속으로 젖고 속으로 마른다


<이름 없음>이란 이름을 가진 사나이가
우체국 앞에서 두 팔 벌리고
야생화모냥 젖어들고 있다
고비 망아지같이 검은 힘줄을 가진 사나이는
<노나래>라는 명찰이 붙은
한국 여중생 추리닝을 뗄룽하니 껴입고 있다


고비를 떠나는 날
잠시 바깥 시간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카메라 들고 조나래 씨를 찾아다닌다
이름 없는 얼굴에 배어 있는
짐작할 수도 없는 시간의 두께를
담아보려고


조나래 씨를 못 만나고 떠나오는 길,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있어도 없어도 상관 안할 야생화가
발가벗은 채 수줍은 아낙처럼
정액을 받아들이듯 감전된 듯
부르르 떨며 빗물을 빨아먹고 있다
갤로퍼 세워놓고 몽골리안모냥
엉덩이 까서 치켜들고 비를 맞으며
짜릿하게 똥을 누어 본다





# 최서림 시인의 본명은 최승호다. 그가 문단에 나올 무렵 이미 시단에 자리 잡은 최승호라는 동명 시인이 있었기 때문일까. 서림이라는 필명으로 문단에 나온다. 세 권의 시집을 서림으로 내고 네 번째 시집부터는 최서림으로 냈다. 서림, 최서림,,어쩔 수 없이 본명을 쓰지 못하고 두 개의 필명으로 떠돌아야 했던 시인은 고비 사막의 바람에서 쓸쓸함을 대신한다. 모든 게 운명 같은 오래된 시집의 자서를 옮긴다.


자서


촉촉한


비에 젖은 돌같이
촉촉한 세상


구멍이 알차게 많은
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세상


부서져 바스락거리는 생이
촉촉이 스며들어가서
잠들고 싶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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