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삼선짬뽕을 먹다가 문득 - 오민석

마루안 2017. 12. 19. 20:20



삼선짬뽕을 먹다가 문득 - 오민석

 


삼선짬뽕을 먹다가 문득 당신이 생각난다
생각은 안 보이는 바다를 떠다니지 않는다
가령 해 저무는 몽산포에
기우뚱 정박해 있던 나룻배처럼 오거나
애인이여, 쓴 소주로 당신은 온다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으로 오거나
서리를 뒤집어쓴 무덤의 시린 이마
눈 내리던 젊은 밤
여인숙 흐린 백열등 아래
미래를 잃고 섞이던 몸으로 온다
내 손을 잡던 또 하나의 온기와
한동안 잊을 수 없었던 욕설
딸기 냄새 같은 것
부두의 기적소리
이를테면 칼 같은 분노
임신한 배와 실직과 횡재의 꿈 같은 것
폴로 향수냄새를 맡을 때마다 떠오르던
플로리다 해변의 군청색 바다냄새
신촌 포장마차의 떡볶이
예물을 팔러 나가던 쓸쓸한 뒷모습
링거를 달고 있던 푸른 팔뚝
냄비에서 끓고 있던 황금빛 라면
당신을 잃는 것은
두 살결의 떨림을 잊는 것
삼선짬뽕을 먹다가
문득 당신이 생각나는 것은
오지 않는 당신을 내가 만나는 방법
기다리는 방식
유물론적 연애
애인이여, 내 손을, 잡아, 다오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인동네








일 포스티노 - 오민석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초록 바다와 가난하고 무식한
우편배달부를 위하여 詩를 썼으니
노동대중이여
아버지의 바다는 슬프다
밤하늘의 푸른 별은 오직 아픈 자들의 것
그 어떤 유희로도 희망을 말하지 마라
작은 나무들과 풀꽃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봄은 멀고 바다는 빛나느니
그 모든 꿈은 가난의 둥지에서 부화된다
오, 나의 가여운 섹스여
먼 사랑이여
인민의 집회여
친구여
총칼보다 더 무서운 사랑이여
나 거기에서 죽음을 헌옷처럼 벗었노라
무수한 실패와 실수와 죄의 날들이여
꿈은 머나
詩는 가깝다
먼 급소를 찌르자





# 오민석 시인은 1958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1990년 <한길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운 명륜여인숙>이 있다. 현재 시인의 모교인 단국대 영문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