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장난 것들 - 이용한

마루안 2017. 12. 14. 23:33



고장난 것들 - 이용한



아침에 나간 추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70년대 라디오 잡음처럼 비가 내리는 밤,
버려진 남자의 폐허 위로
몇 그루의 나무가 시간을 펄럭이며 서 있다
내가 키운 나무들은 아무래도 그리움이 지나쳤다
조금만 비가 와도 와락 눈물에 젖는다
창밖에는 이미 캄캄한 공기가 모든 길을 삼켜버렸다
너무 오래 나는 뒤엉킨 길을 헤매고 있다
비가 그친 뒤에도 내 몸 밖에선
치지직거리는 잡음이 계속된다
어린 시절의 '그'가 마루에 앉아
저녁내 비가 그치지 않는 라디오를 탁탁 두들기다가
누런 공책 뒷장을 뜯어 '고장'이라고 쓴다
고장난 것들,
집 나간 추억을 기다리다 나는 또 지친다.



*시집, 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사








흘러온 사내 - 이용한
-팽목*에서



마흔이 다 된 사내가 손가락에 묻은 밥풀을 혓바닥으로 핥는다
시켜 먹는 밥을 천천히 식혀서
마감 뉴스가 끝날 때까지 비릿한 선창의 밤을 숟가락으로 뒤적거린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 천장에 붙여놓은 물고기 판박이는
간신히 열린 창문 너머로 자꾸만 지느러미를 흔든다
아마도 포구의 철썩이는 것들이 속 좁은 여관의 삶을 흔들었을 것이다
야식 쟁반을 문밖에 내어놓을 때마다
사내는 불륜처럼 저질러 놓은 외로움을 신문지로 덮고 돌아선다
돌아서야만 하는 삶을 지겹도록 살아오지 않았던가
사실 길에서 순교하고 싶은 열망은 늘 길 위에서 저물었다
냉장고 문짝에 붙은 샛별다방과 금강야식 스티커를 손톱으로 긁어내며,
사내는 샛별 같은 배달부와 필경 금강에서 팽목까지 흘러온 어떤 삶을 생각한다
어떤 방에서는 신음 소리가, 어떤 방에서는 울음소리가 나는
서로 다른 삶이 기어이 문틈을 파고든다
언제나 소리가 나지 않은 밤은 사내의 몫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소리의 뿌리를 잘라보아도 사내의 아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떤 여자의 저녁과 어떤 남자의 아침이 이 방 안을 살다 갔듯이
사내는 그저 몇 가닥의 한숨과 터럭을 남기고 흘러갈 것이다
격랑이 다한 팽목의 내력쯤은 사내에게 중요하지 않다
여관에서 내다본 나무의 곡절과 바다의 지독함도 사내의 배경과는 무관하다
사내는 전등 스위치를 내리고, TV 도 끄고 나무토막처럼 누워서
여기까지 흘러온 어떤 사내의 등에 아메바 무늬가 그려진 이불을 덮어주었다.


*다도해 섬을 잇는 진도의 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