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耳順의 골목길 - 김장호

마루안 2017. 12. 13. 20:59



耳順의 골목길 - 김장호
-전봇대 18



예전 이문동 막다른 골목길
대문 앞에 연탄재 쌓인 어느 슬레이트집에
아비는 밤에 리어카로 이삿짐 옮겨간 적 있다


골목길은 도시의 갱도
세상은 밤낮을 야무지게 인수인계하지만
골목길 사람들은 막장에서 탄을 캐듯
골목에 박힌 빛을 캤다


골목길은 도시의 실핏줄
배급이 가장 늦어지던 골목에는
두부장수의 구수한 종소리와 젓갈장수의 짭조름한 목소리가 찾아들었고,
연막소독차의 요란한 소리에 뛰쳐나가면
밥 묵고 나가라!는 어미의 볼멘소리가 마악 뒤따랐다


골목길은 도시의 풀뿌리길
다들 저녁 설거지 서둘러 끝내고
나팔꽃이 휘감고 올라간 나무전봇대 외등 밑에서
귀 쫑긋 라디오 연속극 들으면서 귀로 세상을 읽었던 골목길 사람들,
무거운 새벽이슬을 차며 큰길로 세상으로 나아갔다


골목길은 도시의 팔자주름
허구한 날 을지로 인쇄소 골목에서
십육절 전단을 찍어주었던 울 아비
기분 좋은 밤이면 붕어빵 사들고 옛 노래 흥얼거리며 골목길 접어들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붕어빵 삼남매 소리쳐 불러보시곤 했다


젯날, 이순의 골목길 걸으면
아비의 목소리가 맥놀이치며
누런 두루마리 휴지처럼 자꾸만 따라나온다



*김장호 시집, 전봇대, 한국문연








知天命 - 김장호
-전봇대 19



그날 오후 배낭을 메고 낯선 마을에 내렸다
광장 한가운데 전봇대가 당산목처럼 서 있는 두꺼운 책표지의 마을 풍경 속으로
반환점을 돈 마라톤 선수처럼 다시금 발걸음 옮겼다


안경 고쳐 쓰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책갈피엔 낯선 풍경이 팔짱을 낀 채 쳐다보았고
수요일의 술집은 굳게 입 다물고 있었다
다양한 소품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전봇대 마을의 굳은 표정들
활자가 된 사람들은 마을의 행간을 만들며 지나갔다


한길 벗어나자 숨차게 따라붙는 갈림길
기억의 손가락이 길에 박힌 낯익은 낱말을 짚어가며 다가올 문맥의 의미를 읽어냈다


천명을 앞세워 더러 차선위반에 앞지르기도 했으니
훗날 이 마을에는
밑줄 칠 만한 문장 한 줄쯤 남겨놓으리
양손에 전깃줄 부여잡은 전봇대가 나직이 어깨춤을 춘다






# 어느덧 지천명과 이순 사이에 놓였다. 원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나이 먹으면 연륜으로 인해 너그러워지고 지혜로운 선택을 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되레 욕심만 느는 건 아닌지 반성한다. 아직 한겨울에도 지리산 종주를 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지만 먹고 사는 생활의 지혜는 까마득하다. 철들기는 여전히 더디고 눈물마저 말라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