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하찮은 것들이 장엄해 보이는 - 김남극

마루안 2017. 12. 14. 23:22



하찮은 것들이 장엄해 보이는 - 김남극



가을 숨결이 지난 장엄한 산 위로 구름이 빠르게 지난다
속도를 내는 중이다
잠깐씩 열린 하늘로 비행기 거친 숨이 일직선으로 동쪽으로 뻗어 있다
더 속도를 내는 중이다
속도를 더하는 저 하늘의 위세를 천치처럼 쳐다보며
산은 경건한 척
장엄한 척 누워서
숨도 멈추고 있다


쳐다보면 더 장엄한 것이
내려다보면 더 하찮은 것이 저것들이다
하찮은 것들과 장엄한 것이 혼란스러워
하찮은 것들이 장엄해 보이는 날이 많다
비행기 숨결이 그렇고 구름의 발길이 그렇고
납작집에서 혼자 밥을 안치는 늙은이도 그렇다
내 빈한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연민의 벗들이 또 그렇다



*시집, 너무 멀리 왔다, 실천문학사








산거(山居) 1 - 김남극
-나는 지은 죄가 많아



나는 지은 죄가 많아 손톱이 못났다
넓적하고 평평하고 점잖지 못하다


나는 그 손톱을 보름에 한 번쯤 깎으며
광택도 점점 사라지고 반달 무늬도 점점 흐려지는
그 손톱을 또각또각 잘라내면서


문득 내가 지은 죄가 많아 이렇게 겨울빛이 겨우 드는 산골 마가리에 앉아
등골이 서늘한 겨울숲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다가


한 평쯤 남은 겨울 햇빛에 시린 손을 디밀어본다
온기가 조금 남았으니 내 손에도 조금은 온기가 남았을거라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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